AziMong 2008. 4. 28. 21:32
울나라 역사상 가장 빛나는 업적을 이뤘던 세종대왕.
그러나 그에게도 아주 골치 아픈 문제거리가 있었으니
바로.....골때리는 며느리들 짓거리임다.

세종의 맏아들이자 제 5대 임금인 文宗이 아직 세자였을 때
세자빈인 "휘빈 김씨"가 느닷없이 쫓겨나는 사건이 발생함다.

이유는 단 하나...
휘빈 김씨가 너무 밝힌다는데 있었슴다.

세자가 유약하고 섬세했던 반면
휘빈 김씨는 세자보다 연상일 뿐 아니라
몸집도 컸고 풍만했으며
대가 쎄고 색기를 주체못해 세자를 참기름 볶듯 들들들 볶아
내외사이에 궁합이 맞지않았던 것임다.

밤마다 시달리던 세자가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빌빌거리자
저러다가는 임금이 되기도 전에 산송장되겠다 싶어
드뎌 며느리를 방출하고 새 며느리를 뽑게 됨다.

이때 내건 세자빈의 자격조건은
유순하며 내성적이고 가냘픈 여자......즉 송혜교 같은 여자였슴다.
이렇게 해서 간택된 여인이 바로 "세자빈 봉씨"였슴다.

왕실에서는 저으기 안심한거죠.
저 정도라믄 체격으로 보나 성질로 보나
세자가 휘어잡기에 문제가 없을 뿐 아니라
잠자리에서도 별 트집이 없을 거라고 본거죠.

그...러...나...
새초롬하고 청순한 봉씨는 외모와는 정반대로
"휘빈 김씨" 저리가랄 정도의 색광였으니 이를 우짭니까.
늑대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 검다.

허약한 세자에게 만족 못한 봉씨는
욕구불만으로 짜증과 신경질을 있는대로 부리다가
급기야 도저히 용납받을 수 없는 짓을 저지르게 됨다.

"소쌍이"라는 계집종을 꼬셔 동성애에 탐닉하게 되는 거죠.
장차 조선의 국모가 될 귀한 여자가 계집종과 동성애를 저지른 검다.
봉씨는 천성이 문란했는지 아니면 동성애에 만족을 했는지
나중에는 "석가이"라는 여종도 끌어들여 관계를 가짐다.

역사적으로.....
여자들만이 기거하는 구중궁궐에는 동성애가 은밀하게 존재했슴다.

그 기교와 기술이 가장 발달된 곳은 "할렘"으로
이라크의 아바스왕조 (8C~13C)때 극치를 이루게 되죠.
동성애 기술이 뛰어난 여자를 일컬어 무사히카(비벼대는 여자)라고 하는데
울나라 궁궐에선 레즈비언을 "맷돌부부"라고 하니 뜻이 비슷하죠?

고대 오리엔트에서 동성애는 그다지 흉이 아니었슴다.
아니 오히려 권장사항이었슴다.
스파르타의 왕 류크류고스는
"(남자)시민은 남자애인을 갖지 않으면 진정한 시민이 아니다"라고 말할 정도임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등도 동성연재자였슴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대화"에서
미소년에 대한 숨길수 없는 사랑의 감정을 세밀하게 표현해놓고 있슴다.

아테네에서는 성인남자들이 소년들에게 스승으로서 지식을 가르치며
성관계를 갖는게 일반적인 풍조였다고 함다.
따라서 이시대에서 흔히 "연애"라고 하면
이성간의 사랑이 아니라 남성들간의 사랑을 일컫는게 보통였슴다.

동성애가 얼마나 끈끈한지를 증명하는 실화를 소개함다.
"스파르타"의 막강군대가 "테베"와의 전쟁에서 박살이 났던 이유는
테베의 "신성대"라는 특공대에게 쪽도 못쓰고 깨졌기 때문임다.

이 특공대는 3백명의 정예부대로서 모두 동성애자로 구성됐슴다.
이들이 용감했던 이유는 애인앞에서 놀라운 용맹성을 발휘했으며
위험이 닥치면 서로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 항전을 했기 때문임다.


다시 조선시대로 휘리릭 돌아와서.......

세자빈 봉씨가 계집종 "소쌍이"와 "석가이"와 따블데이트를 하자
자연 "소쌍이"와 "석가이" 이 두뇬은 라이벌이 된거죠.

이 두뇬은 세자빈의 총애를 독차지하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틈만 나면 서로 치고 받고 싸웠슴다.
어느날 이뇬들의 싸움을 소헌왕후가 듣고 대경 실색하여
세자빈 봉씨를 호출해서 자초지종을 문초하게 됨다.

그런데 간뗑이가 분 세자빈 봉씨는 낯빛하나 변하지 않고 대꾸함다.

"그래 나 ...... 커밍아웃 선언할란다.
7년동안 독수공방하면 그 정도는 당연하다.
내가 뭐 남자하고 그짓 한 것도 아니지 않냐.
그런 일은 궁중여인들 사이에서는 흔히 있는일 아니냐
...........홍석천을 방송에 복귀시켜라, 시켜라, 시켜라!!!"

사실 동성애는 궁중여인들에게는 흔히 있었으나
그러나 지체높은 신분에게는 좀처럼 없었던 희귀한 예임다.

다만 고려시대의 충선왕이나 공민왕같은 경우는
지도층 동성연애의 대표적 선구자였긴 했습니다만
이들은 엄연히 "왕"이고 게다가 "남자"였기에
감히 찝쩍대지 못하고 그러려니 하고 용인이 됐던것입니다.

그런데......
법도가 까다롭기로 세계 유례없다는 조선시대에....
그것도 규율이 가장 엄중하다는 궁궐에서...
더군다나 인테리 여자가.......것두 곧 국모가 될 세자빈이......
천하디 천한 계집종과 살을 섞다니!!!!!!

이 일이 조정에 보고되자 대신들은 경악해 마지 않슴다.
왕실에 똥물을 끼얹은 죄 극형에 처해 마땅하다고 연일 목청 돋움다.
그러나 마음좋은 우리의 세종대왕 ......
극형은 면하고 서인으로 강등시켜 방출하는 걸로 판결을 내림다.

궁궐에서 쫓겨나 집으로 간 봉씨는
친정아버지인 "봉여"에게 심하게 꾸중을 당하게 되는데....

그 성질 어디가겠슴까?
아버지에게도 악악대며 거품물고 뎀벼 버림다.
아버지는 집안식구들을 바깥으로 내몰고
그녀에게 허리띠를 풀러주며 자결을 권함다.

그러나 봉씨가 난리를 치며 꼬장을 부려대자
목을 졸라 죽여 버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함다.

"저 세상에서는 부디 잘 살아라...
다시 태어나걸들랑 사내가 되어서 말이다"

아버지 "봉여"도 세상이 부끄러워 그 해 가을 자결하고 마는데
세종대왕은 그 마음을 높이사서 관직을 깍지 않았다고 함다.

이 세자빈 봉씨의 동성애사건은
"어을우동"의 음란기행과 더불어
조선시대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은 대표적 음풍사건으로 기록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