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인턴 위주의 '일자리 만들기'는 '일자리 나누기'와 '중소기업 살리기'로 바뀌어야 합니다." 김영호 유한대학 총장(전 산업자원부 장관)은 "정부가 정규직의 임금을 깎아 인턴을 늘리는 것은 통계치를 위한 일종의 눈속임으로, 사회 전체에 큰 폭탄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김 총장은 일자리 나누기 방식으로 지식정보화시대에 맞는 네델란드모델을 제안하면서, 사회적 대타협을 위해 노동자에 대한 '고통분담'요구가 아니라 사용자와 대기업 노조가 더 양보하는 '희생의 교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전체 일자리의 88%를 차지하는 중소기업을 살리려면 대기업-중소기업-대학을 연결하는 '지식의 대운하'를 파서 혁신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김 총장은 외환위기 이후 일자리, 중소기업, 기업의 사회적 책임 등 한국경제의 화두를 제시하는데 앞장서온 원로 경제학자다. 고희의 나이에도 기고문을 쓰느라 밤을 거의 새웠다는 김 총장을 지난 10일 경기도 부천의 유한대학교 총장실로 찾아갔다.
김 총장은 정부의 잡셰어링 정책에 대해 "임금을 줄이는 것은 분명하지만 일자리를 늘리는 것은 애매하다"고 회의적 반응을 나타냈다. 오히려 임금을 깎으면 생산성 향상을 기대하기 힘들고, 소득감소로 유효수요가 줄고 내수침체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김 총장은 대신 "일자리 확충은 일자리 나누기와 사회서비스 일자리 확대라는 두 가지를 병행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일자리 확충 방식을 정부가 추진하는 임금삭감형이 아니라 근로시간 단축형으로 바꿔야한다는 민주노총의 주장과 방향이 같다. 전문가들은 연간 2400시간에 달하는 노동자들의 근로시간을 줄이면 150만개의 새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일자리 만들기와 일자리 나누기는 비슷하게 들리지만, 접근법은 전혀 다르다. 그렇다면 일자리 나누기의 현실적 대안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김 총장이 먼저 꼽은 것은 유한킴벌리의 뉴패러다임모델이다. 교대조를 2조에서 3~4조로 확대해 일자리를 늘리는 방식이다. 김 총장은 궁극적으로는 지식·정보사회 추세에 맞게 네델란드모델(바세나르 협약)로 가야 한다고 말한다. 네델란드모델은 노조가 임금동결과 해고절차 간소화 등 노동시장 유연화에 동의하는 대신 사용자는 노조의 경영참가와 동일노동-동일임금 원칙을 받아들이고, 정부도 비정규직 보호에 힘써 고용안정과 경쟁력 제고를 동시에 달성한 일종의 사회적 대타협이다. 김 총장은 "(네델란드모델은) 한 회사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곧 일하는 대신, 이 회사에서 파트타임으로 잠깐, 저 회사에서 파트타임으로 잠깐 일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하나의 일자리가 시간대별로 여럿으로 쪼개지는 것이다. 김 총장은 "정보사회의 지식노동자들에게는 이런 근무형태가 더 적합하고 생산성도 높일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 현실에서는 자칫 비정규직만 늘어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김 총장은 그래서 네델란드모델의 핵심은 동일노동-동일임금이라고 강조한다. "같은 일을 하는 노동자들 간에는 임금차이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에 차이가 나면 기업 생산성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안됩니다. 프랑스의 실패가 잘 보여주지 않습니까?"
우리도 사회적 대타협을 위한 시도가 있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노총이 참가한 최근의 노사민정 대합의도 결국 임금삭감의 빌미만 줬다는 비난을 사고 있다. 김 총장은 "대타협을 하려면'고통의 분담'이 아니라 '희생의 교대'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대기업의 성장이 가능했던 것은 중소기업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고, 대기업 노조도 경영자와의 타협을 통해 중소기업과 노조, 비정규직에게 희생을 미뤄오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한국경제는 재벌중심 경제다. 하지만 대기업들은 매출과 이익이 증가해도 직원은 늘리지 않는 '고용없는 성장'을 한다. 김 총장은 이 때문에 일자리 만들기는 '중소기업 살리기'가 돼야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바라보는 중소기업 현실은 우울하다. "중소기업의 처지를 '9988234'라고 말할 수 있어요. '기업수의 99%, 고용의 88%를 차지하는 중소기업이 2~3년 안에 죽는다'는 뜻이죠."
많은 사람들이 중소기업 살리기를 말한다. 하지만 마땅한 대안을 찾기 힘든 게 현실이다. 김 총장은 묘안을 묻는 질문에 "중소기업의 혁신을 위해 대기업-중소기업-대학을 잇는 '지식의 대운하'를 파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들이 서로 혁신을 조장하고, 성과를 흡수해서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생산성 향상이 이뤄져야 일자리가 계속 유지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김 총장은 정부가 4대강 살리기 같은 토목사업으로 일자리를 만들려는 것에 회의적이다. "이번 위기는 과거의 낡은 패러다임이 무너진 결과인데, 그 해법이 토건사업 같은 과거 패러다임에서 나온다면 성공하겠습니까?" 김 총장은 "정부의 '녹색성장'은 실제 '녹색페인트 칠을 한 성장'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그는 또 "미국이 테네시강 개발 같은 공공투자로 위기를 극복했다는 것은 오해"라면서 "대공황은 전자·항공 같은 신사업이 등장해서 고용창출을 했기 때문에 극복된 것"이라고 말했다.
중소기업을 살리거나 지식의 대운하를 파려면 결국 돈이 든다. 민주노총도 250만개의 일자리 창출에 140조원이 필요하다고 추정한다. 김 총장은 금융위기를 초래한 국제투기자본에 세금(토빈세)을 물리는 방안을 주창한다. "4월에 제2차 G20 정상회의가 열려 브레튼우즈체제 이후 새로운 국제금융 및 경제질서에 대한 모색이 본격화하는데, 국제통화기금 주도로 토빈세를 시행해야 합니다." 이 재원과 각국의 그린뉴딜 투자액을 모아서 국제공조로 그린산업을 육성하면 수많은 그린잡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 끝 >
경상북도 문경의 대명화학(사장 박오진)은 기저귀나 여성 위생용품의 원재료를 유한킴벌리에 납품하는 중소기업이다. 경기침체의 골이 깊어지고 있어 주변에선 조업중단, 임금동결·삭감, 감원과 같은 흉흉한 소식이 들리지만, 모두 남 얘기일 뿐이다. 회사는 지난해 말 250%의 상여금을 줬다. 한해 전 100%에 비해 2.5배나 많다. 최근엔 인턴을 포함해 7명 채용공고도 냈다. 직원이 125명인 중소기업으로서는 적은 규모가 아니다.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의 임금인상도 검토하고 있다.
이런 일들이 가능한 것은 그만큼 실적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지난해 500억원이었던 매출은 올해 600억원 이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순이익도 두배 이상 증가가 기대된다. 대기업도 힘들어하는 경영난 속에 중소기업이 선전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경기를 상대적으로 덜 타는 제품의 특성과 높은 수출 비중이 한몫 한다. 하지만 핵심적인 것은 높은 생산성과 적극적인 연구개발 투자, 신제품 개발 능력 같은 혁신역량이다.
제품 품질은 유한킴벌리에 18년째 납품할 정도로 인정받고 있다. 세계적 생활용품업체인 킴벌리클라크에도 수출한다. 싱가포르·타이완·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등 아시아권은 물론 남아공, 이스라엘, 남미 등 전 세계로 시장을 넓히고 있다. 수출비중이 어느덧 70%로 높아졌다. 내수에서도 국내 굴지의 자동차업체에 납품을 시작했다. 지난해 6월에는 자체 연구소도 설립했다.
혁신역량 강화는 2004년말 뉴패러다임 경영혁신모델 도입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회사는 2조2교대 근무방식을 3조2교대로 바꿨다. 교대조 확대로 직원이 58명에서 97명으로 늘면서, 1인당 근로시간이 주당 72시간에서 56시간으로 대폭 줄었다. 회사의 부담이 커졌지만 생산성 향상으로 해결했다. 주말에도 공장이 쉼없이 돌아가면서, 시설투자 없이도 생산량이 25% 늘어나고, 수율도 좋아졌다.
회사는 줄어든 근로시간을 학습에 할애했다. 연간 교육시간을 70시간에서 200시간으로 늘려, 직원들을 '지식근로자'로 양성했다. 성과는 불량률 개선과 안전사고 감소로 나타났다. 새로 도입된 제안제도도 현장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노동연구원 부설 고성과작업장혁신센터의 이영호 기획관리실장은 "근로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의 성공사례"라며 "일자리 창출과 경쟁력 제고를 동시에 이뤘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