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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 본문

.....古典(고전)

궁예

AziMong 2008. 1. 21. 23:52
울나라 역사상 가장 에너지가 넘쳐 났던 후삼국 시대.

영원불멸로만 알았던 천년왕국 신라가 흐물흐물 썩어 빠지자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려고 일어선 수많은 웅지의 싸나휘들 가운데
궁예, 견훤, 왕건으로 압축돼 건곤일척의 승부를 다퉜던 그 시대.....

그 세 영웅 가운데 궁예의 드라마틱한 일생은
많은 소설가들이 즐겨 다뤘던 호기심의 대상였슴다.
TV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왕건 보다 궁예의 활약상에 시청자들의 관심이 더 집중됐었죠.

이 궁예와 비슷한 행적을 걸었던 사람이 또 한명 있슴다.
그게 누구냐면......중국의 주원장(朱元璋)임다.
짜장면 집 이름 같다구여?
아님다.
징기스칸의 元나라를 깨부수고 明나라를 세운 양반임다.

이 냥반은 거의 거지 출신에 가깝슴다.
똥구녕 찢어지게 가난한 소작농의 자식임다.
중국역사에서 신분이 이처럼 미천한 넘이 황제가 된 것은
주원장과 유방(한나라)..... 딱 두넘 밖에 없슴다.

그럼 지금부터 주원장과 궁예가 얼마만큼 닮았는지
굵직한 것만 훑어가며 소개하겠슴다.


★ 소림사 주방장만 돼도 어디야?

(궁예)

어머니로 알았던 이가 생모가 아니라는 사실,
한없이 비천한 줄로만 알았던 자신이 신라 왕자 출신이라는 것,
애꾸가 된 사연과 몸서리 쳐지는 자신의 출생 내력....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궁예는 그 길로 어머니를 떠나
세달사(世達寺)로 들어가 선종(善宗)이라는 법명의 승려가 됨다.

(주원장)

심한 가뭄이 들어 가족 일부가 굶어 죽고
전염병까지 만연해 입에 풀칠조차 힘겨워지자
일단 머리 빡빡 밀고서 황각사(皇覺寺)로 들어가 중이 됨다.
그곳에서 독서와 독경으로 많은 지식을 쌓고
탁발승으로 각지를 떠돌면서 풍속,인정, 지리에 통달함다.


★ 될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틀려...

(궁예)

어느날 까마귀가 자신의 머리를 몇 바퀴 선회하더니
무언가를 떨어뜨리길래 받아 봤더니 "점치는 막대"였슴다.
이게 도대체 뭔가 궁금해서 "호기심천국"에 문의했더니
그 막대에 "王"자가 새겨져 있는 걸로 봐서 왕이 될 팔자라고 하더군요.

(주원장)

백련교도가 원나라 타도의 기치를 들고 궐기하는 등 전국은 혼란상태.
주원장은 절에서 심심풀이 땅콩삼아 화투장을 꼬나 들고
음냐리~~ 오늘의 운세나 볼까나....길흉을 스스로 점 쳐보니
더 이상 죽치지 말고 절을 떠나는 것이 길조로 나오고
백련교도에 가담하면 大吉로 점괘가 나와 그 길로 절을 떠남다.


★ 취업난 시대에는 깍두기 되기도 어려워

(궁예)

당시의 정세는 대홍수와도 같은 격류에 휩쓸리는 상황.
세상은 들끓어 요동을 치고 있었고 민심은 용광로처럼 끓어 올랐슴다.
숱한 고민을 한 끝에 불문을 뛰쳐나와 "죽주의 기훤"에게 찾아가나
명문대 출신 아니라고 원서조차 접수 못하고 보기좋게 거절당함다.
할 수 없이 미달학과를 골라 잡아 "북원의 양길"에게 찾아가자
양길은 기훤과는 달리 궁예를 덥썩 맞아 줌다.....기부금 갖고 왔쥐?
그리고는 굵직한 일을 맡겼을 뿐만 아니라 성큼 졸개 깍두기까지 붙여 줌다.

(주원장)

백련교도 반란군의 수장인 곽자흥에게 가서 가입을 신청함다.
그런데 주원장의 얼굴은 너무도 험상궂고 기괴하게 생겨 먹어서
면접관이 밥맛 없다고 툴툴 돼 거의 빠꾸를 맞을뻔 했으나
주원장이 한국의 명배우 송광호, 설겅구,전두연 등을 거론하자
곽자흥은 그의 비범한 배포가 마음에 들어 선뜻 채용함다.
주원장이 체격, 기억력, 문자해박하여 금방 두각을 나타내자
얼마 안돼 곽자흥의 시중 역할로 파격적인 승격을 함다.


★ 더 쎈 놈 있음 나오라 이거야

(궁예)

양길의 명을 받은 궁예의 군대는 백전백승의 군대임다.
그도 그럴것이 궁예는 전쟁터에서 나날을 보내며 사졸들과 더불어 고락을 함께 했고
주고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 공평하여 사사로이 취하지 않았슴다.
주변사람 바리바리 챙겨주는 전통밑에는 의리파들이 들끓고
지 혼자 냠냠 해 먹었던 짠돌이 노통밑에는 파리새끼 하나 없는거나 같죠.
마침내 궁예는 장군으로 추대 됐고 양길과 결별하여 독자적 세력을 갖춤다.
이후 양길과 기훤은 연합하여 한강지역의 패권을 두고 궁예에게 도전장을 내나
되려 철저하게 아작이 나서 이후 역사 무대에서 사리져 버림다.

(주원장)

주원장의 군대는 대담, 세심, 용감,친화의 장점을 두루 갖춘 무적의 군대.
전쟁에 출두했다하면 지고 돌아 오는 법이 없슴다.
주원장은 어떤 전투에서든 선두에 서서 지휘했으며
전리품은 우두머리인 곽자흥에게 빠짐없이 상납했고
포상품을 하사 받으면 동료및 부하들과 나누어 가지니
주변 사람들이 다투어 슬하에 들어오고 점점 독자세력을 구축하게 됨다.


★ 옴 메 니 반 메 홈

(궁예)

궁예는 미륵불의 하생과 구원, 그리고 이상세계가 임박했음을 설파했고
신라의 핍박과 도탄에 시달린 백성들은 기꺼이 궁예의 백성이 되기를 자청함다.
궁예는 스스로 미륵이라 자칭해 자신이 직접 새로운 불경을 저술하기도 하고
승려와 백성들을 상대로 궁예버전 설법을 강의하기도 함다.

(주원장)

백련교도의 모체는 미륵불임다.
원나라 말기 민심이 흉흉해지면서 각지에서 반란군이 일어나는데
반란군은 "천하대란 미륵불하생"
즉 "천하가 어지러우면 미륵이 내려와 중생을 구제한다"는 서민사상을
대량으로 이용하였고 백련교도는 그 대표적인 존재였슴다.
이들은 붉은 띠를 머리에 두르고 설쳐 대서 홍건군으로 불리웠는데
주원장은 여기에 합류하여 자신의 세력을 뿌리 내린 검다.



★ 깊고도 질긴 지역감정의 뿌리

(궁예)

이쯤에서 궁예는 미륵불이라는 종교적인 이데아와 더불어
고구려라는 정치적인 이데아를 설정하는 꽁수를 두며 백성들을 사로 잡슴다.
한반도의 중부권을 석권해가던 궁예가 퍼뜩 깨달은 것은
이 지역 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고구려"에로의 회귀의식이었슴다.
궁예는 그러한 지역감정을 바탕으로 고구려 부활을 위한 국가의 창건을단행함다.
통일신라로 천년이나 지내 왔으면서도 후삼국으로 그리 쉽게 갈리는걸 보면
요즈음의 지역감정이라는 갈등이 참으로 해법이 없어 보이기 조차 함다.

(주원장)

우두머리인 곽자흥이 죽고 난뒤 군신들의 추대로 주원장은 吳王으로 추대 됨다.
천하제페를 위한 교두보를 마련한 주원장은 라이벌들을 제거해 나가며
중요한 정치적 이데아를 만천하에 공표하니
그것은 윈제국의 타파를 위한 북벌정책이었슴다
몽골오랑캐를 몰아내고 엣 한족의 영광을 되 찾고저 한다는 그의 선언에
한족 전체가 순식간에 똘똘 뭉쳐 반 몽골 민족 통일 전선을 구축하게 되는 검다.
중국넘덜 역사는 대체적으로 한족과 북방민족간의
밀고 땡기며 왔다리 갔다리하는 땅 뺏기 싸움의 연속임다.
명나라 다음에는 여진족인 청나라가 들어서서 도찐개찐이 되죠.



★ 함부로 엉기지 말란 말이야

(궁예)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자처한 궁예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에 대해 무자비하고도 철저한 파괴를 선언함다.
신라수도인 "경주를 쳐부서야 할 도읍"이라는 뜻으로 멸도(滅都)라고 일컫고
심지어는 항복해온 신라 사람들 조차도 가차없이 죽여버리고 맘다.

(주원장)

吳王이 된 주원장의 마지막 라이벌은 蘇州의 張士誠이었슴다.
결과적으로 蘇州는 함락되었지만 소주사람들은 끝까지 항전했죠.
쫀심으로 똘똘 뭉쳐진 주원장의 핏대는 있는대로 올랐슴다.
군인들은 물론 주민들에게 까지 잔혹한 보복을 가했고
주민 30만을 강제 이주 시켜 천하의 절경인 소주를 황폐하게 만들었슴다.


★ 똥누러 갈 때와 나올 때가 같은 줄 알어?

(궁예)

고구려의 부활이라는 숙원을 이룬 궁예는 공평무사함과 포용성을잃게 되고
오만불손과 기괴한 언행이 많아졌으며 사람들을 죽이는 잔혹성을 보이기 시작함다.
유아독존적인 교주로서의 성격파탄으로말미암아
사람들이 자신을 해치지 않을까 하는 피해 망상증에 시달리면서
그 타개책으로 "관심법"이라는 넘겨짚기로 위협세력들을 제거해 나감다.
말년에는 반역이라는 죄명을 씌워 하루에도 100 여명씩이나 죽였다는데
결국 궁예는 "민심의 인기에 연연 않는 강한 정부"를 내세우다 파국을 맞슴다.

(주원장)

마침내 1368년에 명나라 황제에 등극한 주원장.
그러나 황제가 된 주원장은 이전의 모범적인 군주의 모습은 간데 없고
180도 휘까닥 회전해서 전형적인 독재자로서의 길을 걷고야 맘다.
주변 모든 넘덜이 자신의 자리을 노리는 것만 같은 의심에 빠져
어떤 넘이던 언제든지 때려 죽일 수 있다는것을 매일 과시하듯이
궁정마당에서 몽둥이 찜질로 신하들을 죽이는게 다반사였슴다.
어떤 공신 고관을 막론하고 황제 앞에서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걸 과시한 검다.
신하들은 조정에 들어갈때마다 "이것이 최후일지도 모른다"고
가족들에게 이별을 고하는게 매일 매일의 일과였다고 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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