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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고전)

풍류를 꽃피운 황진이

AziMong 2008. 1. 23. 08:36
풍류를 꽃피운 황진이
최 승 범
(시인, 전북대 명예교수)
 
 
황진이는 송도의 기생이었다. 기생으로도 여느 기생과 같은 기생이 아니었다. 다재다능한 명기였다. 명기 중에서도 명기요, 뛰어난 예술가였다.
일찍이 이능화(李能和)는 그의 {조선해어화사}(1926)에서 우리나라 역대 명기를 다음 몇 갈래로 나누어 말한 바 있다.
  유재모이채지명기(有才貌異彩之名妓)
  능시가서화지명기(能詩歌書畵之名妓)
  선해담지명기(善諧談之名妓)
  절의효지기(節義孝智妓)
이러한 갈래 중 황진이는 재모와 시가의 두 조항에 들어 말하였다. 말하자면, '출중한 재주'와 '경국의 미색'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한시와 시조·노래에도 뛰어난 명기를 꼽았다.
이러한 황진이인데도 그녀의 생몰년대는 밝혀져 있지 않다. 김지용(金智勇)은 {역대여류한시문선}(1973)의 [황진이 약전]에서 그녀를 중종 때의 명기로 보고'중종(1506∼1544) 초엽에 활약'하였다고 했다. 그녀와 교유한 당시 명사들의 생존년대로 미루어 추정한 것이다. 명사들과의 이야기도 몇 가지 야사·시화류에 극히 단편적으로 전할 뿐이다.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의 {어우야담}, 이덕형(李德泂, 1566∼1645)의 {송도기이}, 허균(許筠, 1569∼1618)의 {식소록}, 서유영(徐有英, 1801∼1853)의 {금계필담},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의 {숭양기구전} 등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처럼 영성한 자료인데 비하여 오늘날까지도 많은 인구에 화자되고 있다. 그녀의 재주와 미모가 그렇고, 그녀가 남긴 시조와 한시가 그렇고, 풍류롭게 살다간 한 생의 이야기들이 그렇다. 그녀의 무덤은 오늘의 북녘에서도 개성 근교인 장단(長湍)에 잘 보전되어 있다고 한다. 그녀의 한 생을 소재로 한 작품들도 줄곧 이어졌다. 한시문들은 제쳐놓고 현대소설만 해도 이태준·박종화·정비석·유주현·최인호에 의한 것들을 들 수 있다.
그녀가 남긴 작품에 관한 연구도 적지 아니 이루어졌다. 이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강전섭(姜銓燮)의 {황진이 연구}(1986)도 있다.
이제 황진이의 전기적인 이야기는 위에 열거한 자료로 대신하여 좋을 것 같다. 여기에선 그 동안 내 나름대로 그녀의 삶과 시조에서 느껴운 풍류적인 일면을 들어 주어진 지면을 잇고자 한다.
 
내가 처음 황진이를 만나게 된 것은 1950년대초의 대학시절이었다. 가람 이병기(李秉岐) 선생을 통해서였다. 선생께서는 황진이를 지극히 사랑하셨다. '국문학사'·'국문학개론'·'시조론' 등 강의시간, 황진이에 이야기가 이르면 선생은 침이 튀는 것도 모르는 열강(熱講)이셨다.
― 나의 시조 스승은 황진이였다.
― 황진이는 기생보다도 시인·예술가였다.
― 황진이의 한시는 이백·두보에 비견할만 하다.
― 황진이의 시조는 개개이 신운(神韻)이 생동하는 절작(絶作)이다.    등등, 요지의 말씀이었다.
가람 선생의 저러한 말씀에 나도 황진이를 사모하기로 하였다. 우선 그녀의 작품들을 찾아보았다. 한시 여섯 수, 시조 여섯 수가 전부였다. 단편적인 자료들도 추심해 보았다. 그리고 3학년 때였던가, [천성의 시인 황진이]를 제목으로 한 편의 글을 엮어, 전북대학교 국문학과의 학회지 《국어문학》에 발표한 바 있다. 프린트로 발행한 것이다.
지금 되챙겨볼 수 없게 되었으나, 그녀의 삶이나 시조에 대한 생각은 저때나 이때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그녀의 모습은 언제나 내 앞에 한 폭 미인도로 떠오른다. 그것도 꾸밈없는 검소한 옷차림에 담장한 미인의 그림이다. 그녀의 시조는 언제나 되읊어도 치렁거린 멋이다. 물론 그녀에겐 정한(情恨)도 있었다. 그러나 그 정과 한도 안으로 접어 노래로 다스린 고즈넉한 멋이었다. 속례(俗禮) 같은 것에 얽매이지 않은 그녀의 자유스러운 성행(性行)에도 외려 향기가 돋는다.
그녀의 이름에 생각이 미친다. 본명은 진(眞)이다. 이로하여 어려서는 진이(眞伊), 처녀 때엔 진랑으로 불리우기도 했다. 기생이 되어서는 명월(明月)이라는 이름이었다.
― 眞
에서는 순수, 진실, 자연을 생각하게 된다.
― 明月
에서는 청산, 녹수, 청풍이 어울어져 떠오른다. 그녀의 삶에도 그녀의 시조에도 '진'과 '명월'이 어려 있다. 아니 바로 '진'과 '명월' 그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여 풍류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풍류는 고매불기(高邁不羈)한 것이다. 거기엔 맑은 바람의 흐름이 있고 밝은 달의 얼비침이 있기 때문이다.
 
황진이의 여섯 수 시조에서 풍류적인 면을 살펴보기로 한다. 기생들의 시조에는 대부분 그 시조가 지어진 유래 같은 것이 곁들여져 전한다. 소춘풍의 시조에 문무군신(文武群臣)들의 술자리 이야기가 따라 있고, 소백주의 시조에는 박엽(朴燁), 이매창의 시조에는 유희경(劉希慶), 매화의 시조에는 춘설(春雪 : 妓名), 구지의 시조에는 유일지(柳一枝), 한우의 시조에는 임제(林悌)와의 이야기가 얽혀 있는 것과 같다.
황진이의 여섯 수 시조에는 유래담이 전하는 것도 있고, 전하지 않는 것도 있다.
 청산리 벽계수(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일도창해(一到滄      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명월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 간      들 어떠리.
이 시조에는 종신 이씨(李氏) 벽계수(碧溪守)와의 이야기가 전한다. '碧溪守'는 벽계고을의 수령, 시조에선 이와 음이 같은 '碧溪水'라 하고 자신의 기명인 '明月'을 짜넣은 황진이의 기지(機智)다. 얽힌 이야기는 {금계필담}에 전한다.
순수하지 못한 꾀임수로 가까이 하고자 한 이벽계수를 낙마(落馬)하게도 하였다는 시조다. 황진이의 기지와 풍류적인 여운에 젖어볼 수 있다.
 산은 옛산이로되 물은 옛물 아니로다/주야에 흐르니 옛물이 있을      소냐/인걸(人傑)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노매라.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      할손가/녹수도 청산을 못잊어 울어 예어 가는가.
이 두 수 시조에는 한 인걸에 대한 애도와 추모의 정이 담겨 있다. 인걸은 누구였을까. 문헌적으로 밝혀진 바는 없으나, 화담 서경덕(徐敬德)을 말함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황진이가 평생 '성인'으로 우러러 사모한 인물이 화담이었기 때문이다. 화담과의 이야기는 {식소록}에 전한다.
― 진랑은 평생 화담의 사람됨을 사모하였다. 반드시 거문고와 술을 가지고 화담에게 가서 즐기곤 하였다. 매양 말하기를 지족선사(知足禪師)의 30년 면벽수양을 꺾은 바 있으나, 오직 화담 선생은 여러 해를 가깝게 지냈지만 끝내 관계하지 않았다. 선생이야말로 성인이셨다.
― 조랑은 송도삼절(松都三絶)을 말하기도 하였다.
'송도삼절'이란 황진이가 어느 날 화담에게 한 말이다. '선생님, 송도에는 절미한 세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박연폭포와 선생님 그리고 소인입니다'의 대답이었다고 한다. 여기에서도 황진이의 '고매불기'한 풍류를 느낄 수 있다.
두 수 시조는 화담에게 소관된 것으로 보아 마땅하다. 황진이의 풍류는 속세를 떠나 산수를 즐김에도 있었다. 금강, 태백, 지리 등 여러 산을 유람하고 송도로 돌아온 것은 화담이 세상을 뜬 후였다. 그녀는 화담정사의 물가에 나가 앉아 '지나가는 것은 물과 같은 것, 밤낮없이 멎지 않는다'의 공자 말씀을 되챙겨보며 생전의 화담을 애도하고 추모한 시조인 것이다.
     의 세 수 시조는 '유한한 인생의 한 철학을 담고 있으면서도 한갖 설리(說理)가 아닌' 정서적인 멋을 느끼게 한다. 남성을 '물'로 여성을 '산'으로 비유한 것도 황진이의 기지(機智)에 찬 풍류다.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로더냐/있으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타여/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대/월침삼경(月沈三更)      에 온 뜻이 전혀 없네/추풍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      리 넣었다가/어른님 오신 날 밤이어드란 굽이굽이 펴리라.
이 세 편은 정한을 길어낸 시조다. 상대방은 누구였을까. 이에 따르는 이야기도 전하지 않는다. 기생이었으니 각기 다른 대상을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보면, 이는 황진이의 풍류를 모르는 이야기다. 한 사람에 대한 애틋한 정한을 노래한 연작(連作)으로 보아야 한다.  에서는 이별에 아무런 안달없이 보내놓고 나서야 그리워지는 사랑을,  에서는 시간이 흐르고 철이 바뀌어도 잊을 수 없는 그 사랑을,  에서는 그 사랑과 다시 만날 밤의 정경을 상상으로 담아낸 일련의 작품인 것이다.
나는 이 사랑의 대상을 양곡 소세양(蘇世讓)으로 보고자 한다. 임방(任防, 1640∼1724)의 {수촌만록}에 전하는 다음 이야기로 하여서다.
― 양곡 소세양은 몸가짐을 조심하였다. 어느 날 친구들과 약속하기를, '황진이가 재색겸비한 명기라 해도 30일 동안만 동숙하고, 더 미련을 가지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고 했다. 기한이 다한 날, 황진이는 이별을 슬퍼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이 다만 한 가지 청이었다. '변변찮은 시 한 수 드리고 싶습니다'. 양곡은 이 시를 읊고 나서, '내가 그래 사람이 아니란 말이냐'고 자조하며 더 머물렀다는 이야기다. 저 때 황진이의 시는, [송별 소판서 세양](送別蘇判書世讓)의 제목으로 전한다. 칠언율시의 전·결구는 다음과 같다.
흐르는 물소리는 거문고 소리에 맞추어 차갑고/매화향기는 피리 속에 스며들어 그윽하여라/내일 아침 서로 헤어진 후에는/그리는 마음 푸른 물결 같이 길리라.
( 流水和琴冷 梅花入笛香 明朝相別後 情意碧波長 )
얼마를 더 머물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두 사람은 끝내는 헤어질 수밖에 없었고, 양곡은 송도를 떠났다. '헤어짐에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少無 別之色)는 황진이는 헤어진 후 이윽고  의 시조로 이별의 한을 달랬을 터이다. 매화향기로 보아 봄철이었던가. 송도를 떠난 양곡으로부터는 아무런 소식도 없는데 봄은 가고 여름도 가고 낙엽소리 스산한 가을철에 이르렀다. 가을철 긴 밤을 앉아 황진이는  의 시조를 흥얼거리지 않았을까.
다시 가을도 가고 겨울이 이르렀다. 겨울밤은 추야장보다도 더 '기나긴 밤'인 것을, 황진이는 또 한 수의 노래를 챙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의 절창이 이루어졌다고 본다.
떠나간 사람에 대한 울고불고의 원망이 없다. 기껏하여 이별 직후의 아쉬움도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로 달래고, 갈아드는 계절따라 솟아오르는 그리움도 창문을 여닫으며 '추풍에 지는 잎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로 씻어내리고 있다. 동짓달 긴긴 밤엔 님이 '오신날 밤'을 홀로 상상하고 있을 뿐이다. 한 사랑에 대한 유풍여운(流風餘韻)에 젖지 않을 수 없다.
 
황진이에 얽힌 화담 서경덕과 백호 임제(林悌, 1549∼1587)의 시조에서도 여운이 짙은 풍류적인 멋을 느낄 수 있다. 화담의 시조는 황진이의 생시에 얽혀 있고, 백호의 시조는 황진이의 사후에 얽혀 있다.
먼저 화담의 시조,
마음이 어린 후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萬重雲山)에 어느 님이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가 하노라.
를 본다. 이 시조를 흔히 화담이 황진이를 그리워하여 지은 노래라고 하기도 한다. 이는 앞에서 든 {식소록}의 황진이와 화담과의 이야기와도 걸맞지 않는 속설로 보아야 한다.
'마음이 어린 후니'의 마음은 화담의 마음이 아니요, 황진이의 마음이다. 어느 날이었던가. 황진이는 여느 때와 같이 화담을 찾아갔다. 그녀는 양곡 소세양과의 이별 후 이야기 끝에 전 항에 든 시조  를 읊었다.
― 추풍에 지는 잎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이야기와 시조를 다 듣고 난 화담이 위의 시조로 대답을 대신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네 마음 어리석구나. 서울 벼슬자리로 돌아간 양곡을 기다리다니'의 일깨움이었다.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가 하노라'의 종장도 황진이 시조의 종장 '추풍에 지는 잎소리야'를 받아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느냐'의 반문이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화담의 시조를 황진이 연모의 속설로 본다면 선비의 풍류랄 수 없다. 화담은 벼슬길에도 욕심이 없었다. 현량과(賢良科)에 수석 추천을 받고도, 또 어머니의 권을 이기지 못해 생원시에 장원급제를 하고도 끝내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오직 학문과 후생교육에 한 생을 바친 어른이 아니었던가. 화담의 저 시조는 풍류적인 멋에서 물 흐르듯 이루어진 것이다.
백호의 시조,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었단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난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 하노라.
는 황진이의 사후 후일담과 더불어 전해진 유명한 노래다.
백호가 평안도사(平安都事)로 부임하는 길에 송도를 지나다가 장단에 있는 황진이의 무덤을 일부러 찾아가서 치제(致祭)하고 읊었다는 시조다. 백호는 이 시조로 하여 조야의 비난을 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러나 비난을 한 이들은 풍류를 모르는 속유(俗儒), 속배(俗輩) 들이었을 것이다.
백호는 당대의 풍류랑이었다. 평양기생 한우(寒雨)와의 술자리에서 주고 받은 시조도 전한다.
 
― 북천(北天)이 맑다커늘 우장 없이 길을 나니/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寒雨]로다/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白湖)
― 어이 얼어 자리 무삼 일 얼어 자리/원앙침(鴛鴦枕) 비취금(翡翠衾)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寒雨)
가 곧  그것이다. 이 '화답가'를 놓고도 풍류를 모르는 속유·속배들은 얼마나 수다스럽게 떠들었을까.
멋진 30수의 시조를 남긴 상촌 신흠(申欽, 1566∼1628)은 한 수필에서 또한 멋진 말을 남겼다.
― 잔술을 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나 조금이라도 인욕(人慾)을 좇으면 화약을 안은 술지옥이다. 손님을 즐겁게 하는 일은 달통하는 일이나, 조금이라도 속된 흐름에 떨어진다면 희비가 교차하는 인욕의 세계다.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술잔을 기울인 백호에게 무슨 인욕이 있었겠는가. 술자리를 술과 노래로 잗단 세상사 잠시 잊고 흥취를 돋우자는 데에 또 다른 무슨 인욕이 있었겠는가. '얼어 자리' '녹아 자리'도 속되게 풀어서는 안 된다. 술자리에서의 흥취요 아취(雅趣)다. 풍류다.
 
황진이의 여섯 수 시조와 그녀에게 얽힌 화담과 백호의 시조를 중심으로 풍류를 이야기하자는 것이 장황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풍류란 무엇인가. 일찍이 최치원(崔致遠)은 '현묘지도(玄妙之道)'라 하여 그것은 우리 고유의 것이면서 유·불·도의 3교까지도 포함하고 있어 사람들을 접화(接化)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풍류의 원뜻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뒤로 내려오면서 이 말에도 속기(俗氣)가 끼여 들었다. 사전에 따라서는 기루(妓樓), 염사(艶事), 정사(情事)로까지 풀이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풍류는 남녀관계에 있어서도 어디까지나 세속적인 것을 떠난 데서 우러난다. 풍기게 된다. 청풍·명월·청산·녹수와 같은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높이 살 수 있는 마음이어야 한다. 이러한 마음일 때 풍류를 꽃처럼 피워낼 수 있다.
황진이, 서화담, 임백호의 시조는 저러한 풍류에서 피어난 꽃 중의 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