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있는 뿌리깊은 이야기
후궁과궁녀 본문
후궁
조선시대 국왕의 혼례 절차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라 준수되었는데, 그 과정은 대략 이러하다. 우선 왕의 혼인이 결정되면 '가례도감(家禮都監)'이라는 임시 관청을 설치하고 전국에 금혼령(禁婚令)을 내린다. 가례도감은 왕의 혼례를 주관하는 관청이고, 금혼령은 왕의 배우자가 될 만한 연령에 있는 처녀들의 혼인을 금하는 명령이다. 금혼령이 내려지면 처녀를 둔 가문에서는 조정에 보고해야 했는데, 이 보고서를 '처녀단자(處女單子)'라고 한다. 이 단자에는 처녀의 사주(四柱)와 거주지, 그리고 부·조·증조·외조의 이력을 기록하여 가문 내력을 알 수 있도록 했다. 처녀단자를 접수한 왕실에서는 이를 기초로 3차에 걸쳐 선발했는데, 초간택(初揀擇)·재간택(再揀擇)·삼간택(三揀擇)이 그것이다. 간택은 대체로 왕실의 어른인 대비가 주관했는데, 왕비 감을 미리 내정해 놓고 간택한 경우가 많았다.
조선의 온 땅과 만 백성을 주관한 국왕도 자신의 배우자만큼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었으니, 요즈음 젊은이들의 연애 풍속도에 비추어 보면 국왕도 부럽지 않은 측면도 있다고 하겠다.보통은 왕의 자식을 낳은 후궁들이 내명부의 직첩을 받았다. 그렇지만 후궁이 예쁘고 마음에 들면 왕은 그 여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내명부의 직첩을 내리기도 하였다. 때문에 왕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이를 기화로 권세를 흔들던 후궁들도 적지 않았다. 연산군 시절의 장록수, 광해군 때의 김개시, 숙종대의 장희빈 등은 왕의 후궁으로서 일세를 풍미하던 여인들이라 하겠다.
그러나 후궁들에게 부귀영화만 주어졌던 것은 아니다. 만약 자신이 모시던 국왕이 죽고나면, 그녀는 개가를 할 수도, 다른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질 수도 없었다. 죽을 때까지 수절해야만 했다. 왕을 모시던 여성들은 나라에 모범을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들만이 국왕의 아이를 잉태할 수 있고, 국왕의 아들만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 후궁들이 국왕 이외의 다른 남자와 동침한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였을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국왕과 혈통이 다른 사람이 왕위를 계승한 꼴이 되므로, 그 왕조는 생명력과 정통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 단적인 예로써, 고려 말 이성계세력이 공민왕의 아들 우왕과 창왕에 대해 왕씨(王氏)가 아니라 신씨(辛氏)라는 이유를 내세워, 그들을 폐위시켜 사실상 고려왕조를 종식시킨 사실을 들 수 있다.
조선시대의 왕비는 왕이 사망한 이후에도 계속 대궐에서 살았다. 자식을 낳은 후궁들의 경우에는 장성한 자식들과 함께 살 수 있었다. 문제는 자식도 없이 갑자기 과부가 된 후궁들이었다. 이들은 대개 여승이 되었는데, 수절을 하면서 죽은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함이었다. 조선초기 과부 후궁들이 머리를 깍고 모여 있던 절이 바로 정업원(定業院)이라는 곳이었다. 그 이름의 의미가 재미있다. "업(業)이 정해져 있는 사람이 사는 집이다"라는 뜻이다. 그 업이란 바로, '국왕을 모실 수 있는 기쁨'과 '국왕만을 모셔야 한다는 족쇄' 이 두 가지 모두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 궁녀
구중 궁궐 안에서 국왕 일가의 시중을 전담하던 여인들, 이들이 바로 궁중의 꽃이라 불리던 궁녀다. '대전 회통'에 의하면 궁녀란 궁중 여관의 별칭으로 상궁 이하의 궁인직, 즉 궁중에서 일하는 여성 관리들을 뜻한다. 일반적으로는 상궁과 나인만을 의미하지만, 넓게는 그 아래 하역을 맡은 무수리·비자·의녀(醫女)등이 모두 포함된다. 무수리는 각 처소에서 막일을 담당하던 여인들로 민간의 아낙네들이었다. 무수리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은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로, 무수리로 궁중에서 지내다가 숙종의 은총을 입어 숙빈의 지위에까지 올랐던 여인이다. 무수리가 통근을 하는데 반해, 비자는 붙박이로 각 처소 혹은 상궁의 살림집에 소속된 하녀를 일컬었으며, 마지막으로, 의녀는 일명 여의사로서 궁중의 내의원에 소속돼 있던 사람이었으나 여순경의 역할과 잔치 때 무희의 역할도 겸했다.
1) 궁녀의 부서
①지밀 :
지밀이란 가장 지엄하고 중요하여 말 한마디 새어 나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왕과 왕비가 거처하는 침전과 안사랑, 대청 등이 있는 곳에서 근무하며 왕과 왕비를 보필하는 가장 중요한 업무를 맡은 핵심 부서.
②침방 :
왕과 왕비의 옷, 이부자리 등을 만들었다.
③수방 :
의복 등 궁중에서 소요되는 장식물에 쓰이는 수를 놓는 부서
④생과방 :
음료와 과자를 만드는 부서
⑤소주방 :
안소주방은 조석 수라를 관장했으며, 밖소주방은 잔치 음식을 만들었다.
⑥세수간 :
왕과 왕비의 세숫물과 목욕물을 대령하고, 지(요강)·타구·매화틀(변기) 등의 시중을 담당했다.
⑦세답방 : 빨래와 다듬이질, 다리미질, 염색까지 그 뒷손질을 담당했다.
2) 궁녀도 직급이 있었을까?
궁녀와 후궁을 포함해 궁궐에서 근무하는 여인들을 내명부라고 했는데, 맡은 일에 따라 품계가 나눠져 있었다. 고려에서는 왕의 적처(嫡妻)를 왕후라 하고, 그 후궁은 부인(夫人)이라 하여 중국의 천자와 대등한 호칭을 하였으며, 후궁인 부인들에게는 내명부(內命婦) 벼슬인 귀비(貴妃) ·숙비(淑妃) ·덕비(德妃) ·현비(賢妃)의 명칭과 정1품의 품계를 주었는데, 이 명칭은 정종(靖宗) 이후 궁주(宮主) ·원주(院主) 또는 옹주(翁主) 등 개칭이 빈번하였다. 고려에서 후궁이 많았던 왕으로는 태조로서, 그는 건국과정에 호족(豪族) ·공신(功臣) ·귀화귀족(歸化貴族)들을 회유하기 위한 혼인정책으로 제1왕후 외에 제6비까지를 왕후라 부르고 부인이라 칭한 후궁만 20명이 넘었다.
조선시대에는 중국 제후국(諸侯國)의 예(禮)를 뚜렷이 하여, 왕의 적처는 후(后)라 하지 않고, 격하하여 비(妃)라 하고, 후궁들에게는 내명부의 벼슬을 주어 숙원(淑媛:종4품) ·소원(昭媛:정4품) ·숙용(淑容:종3품) ·소용(昭容:정3품) ·숙의(淑儀:종2품) ·소의(昭儀:정2품) ·귀인(貴人:종1품)의 순으로 올리고, 후궁의 으뜸은 빈(嬪:정1품)이라 하였다. 이 빈에는 처음부터 왕의 후사(後嗣)를 위하여 왕비나 세자빈과 같이 금혼령(禁婚令)을 내리고 간택하여 들어오는 경우와, 궁녀로 들어왔다가 왕의 총애를 입어 왕자를 낳고 궁녀에서 소용 ·숙의 등을 거쳐 빈으로 승격되는 경우가 있다. 경종(景宗)의 생모인 장희빈(張禧嬪) 등 선원보(璿源譜)에 올라 있는 역대 빈들은 거의 후자에 속한다. 조선시대의 후궁은 규정으로만 하여도 숙원에서 빈까지 8명에 이르나, 태종 ·세종 ·성종 ·선조 ·영조와 같이 치적(治績)이 뚜렷하다고 후대에 인정받은 왕들은 후궁의 수가 많아, 이들에게는 자녀를 낳은 후궁이 9명이었고, 자녀를 낳지 않아 선원보에 오르지 않은 여인까지 합하면 몇 명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3) 궁녀도 월급을 받았을까?
궁녀들은 여성 관리였기 때문에 나라의 녹봉을 받았다. 매월 정기적인 보수로 쌀 세 말과 그외 옷감 등도 특별히 하사 받았다고 전해지는데, 기록에 의하면 돈으로 월급을 받기도 했다. 순종때 지급됐던 월급명세서를 기준으로 환산해 보면, 당시 가장 높은 보수였던 196원은 지금의 화폐가치로 계산할 때 약 150만원 정도에 해당된다. 궁녀들은 맡은 업무와 연차, 품계에 따라 월급을 차등 지급받았던 여성공무원이었던 것이다.
4) 궁녀가 되려면?
왕을 가까이서 모셔야 하고 또 왕의 여자가 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궁녀의 선출 조건은 까다로웠다. 궁녀는 각 부서별로 그 나이가 달랐는데, 지밀은 4,5세,침방과 수방은 7,8세 그외 부서는 13세 미만으로 어린 나이에 뽑혀 들어왔다. 궁녀의 출신성분은, 조선 초기에는 관청의 여종이나 기첩의 소생있었으나, 점차 양가집 규수들이 궁녀로 선발되게 되면서 이에 따라 조혼 등의 폐단이 생기기도 했다.
5) 거쳐야 할 절차
궁녀가 되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할 절차가 있었는데, 바로 처녀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12,13세의 당시로서는 성숙한 나이의 경우에만 실시하던 것으로 앵무새의 피 한 방울을 팔에 떨어뜨려 피가 묻지 않으면 처녀가 아니라 해서 탈락시켰다.
6) 궁녀의 생활
궁궐에 들어와 15년이 지나면 견습 나인들은 관례식을 치르고 정식 나인이 되었다. 이때부터 궁녀로서 본격적으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관례식은 곧 성인으로 독립하는 것을 의미했는데, 궁녀에게는 이 관례가 사실상 혼례이기도 했다. 궁녀는 왕을 위해 평생을 살아야 하는 여인이기 때문에 왕에게 시집가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를 가졌던 것이다. 관례식을 치른 궁녀는 스승 상궁으로부터 독립해 두명씩 짝을 지어 한방을 쓰며 살았는데, 동거하는 궁녀들끼리 간혹 동성연애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7) 궁녀들의 최대 희망은?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와 평생을 갇혀 지내는 궁녀들, 그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희망사항은 바로 승은을 입는 것, 즉 왕과 성관계를 갖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왕의 총애를 받아 승은을 입게 되면 시중을 드는 입장에서 시중을 받는 입장으로 그 위상은 물론 대우가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후궁 역시 왕비처럼 간택을 해서 뽑기도 했는데, 궁녀들은 일의 특성상 왕을 가까이 할 기회가 많기 때문에 간택 절차를 거치지 않고 바로 후궁이 될 수 있었다. 궁녀가 승은을 입고 왕자녀를 낳게 되면 종4품 숙원에서 높게는 정1품의 빈, 즉 후궁의 자리에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5,6백명의 수많은 궁녀들 사이에서 왕의 눈에 띄어 총애를 얻는 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왕의 승은을 입는 것은 궁녀가 권력을 손에 쥘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8) 궁녀로서 가장 높은 지위에 올라간 여인들
궁녀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이들은 바로 왕의 승은을 입어 왕세자를 출산한 여인들이었다. 서울 궁정동 청와대 경내에는, 이러한 여인들의 사당을 모셔놓았는데 이곳이 바로 칠궁이다. 후궁이 낳은 왕들이 종묘에 들어갈 수 없었던 자신들의 생모를 기리기 위해 만들었던 곳이다. 이곳의 모셔진 위패의 주인공들로는 진종의 어머니인 정빈 이씨,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 장희빈으로 더 유명한 경종의 생모 희빈 장씨, 원종의 생모인 인빈 김씨, 비운의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귀비 엄씨 등이 있다.
9) 상궁의 지위는?
상궁은 왕의 측근에서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으며 그 영향력도 커 정승들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특히, 어명을 받들고 내전의 재산을 관리했던 수백 궁녀의 장인 제조 상궁은 정치적으로도 그 영향력을 발휘하는 위치에 있기도 했다. 권력의 최측근에 서 있던 궁녀, 그들은 궁 안의 또다른 실세로 자리하고 있었다. 궁녀가 궁에 들어와서 상궁이 되는데는 원칙적으로는 30년에서 35년의 세월이 걸렸다.
10) 상궁의 직위와 명칭은?
①제조상궁 :
일명 큰방상궁이라 하며 수백 궁녀의 장이다. 물론 한 사람뿐이며 대전 어명을 받들고 내전의 대소사를 주관하므로 학식이 많고 인물도 빼어나야 했다.
②부제조상궁 :
제조상궁 아래의 차석으로, 내전 금고를 관리했다.
③시령상궁 :
잠시도 왕의 곁을 떠나지 않고 항상 어명을 받들 자세로 대기했기 때문에 지밀 상궁이라고도 했다.
④보모상궁 :
왕자녀의 양육을 맡은 내인 중의 총 책임자였다.
⑤시녀상궁 :
시녀 상궁의 임무는 궁중 지밀에 여러 가지를 봉사하는 것이었으며, 이밖에도 일반상궁들이 많이 있었다.
11) 궁녀의 말년은?
이렇게 외부와 단절된 채 한평생을 궁궐에서 지내온 궁녀들은 나이가 들어 병이 들면 궁궐에서 나와야 했다. 마땅히 의지할 곳이 없었던 궁녀들에겐 또 하나의 어려움이었다. 서울 은평구 갈현동의 궁말은 궁녀가 모여산 마을이라고 해서 궁말이라고 불리웠던 곳으로, 궁궐에서 나온 궁녀들은 이렇게 마을에 모여 살기도 했고, 절에 시주하며 만년의 쓸쓸함을 달래기도 했다. 규율과 법도에 얽매여 외부와 차단된 채 외롭고 쓸쓸한 생을 보내야 했던 궁녀들. 어쩌면 이들은 봉건적인 왕조 사회의 희생자였다. 그러나, 여성의 활동이 제약받던 시기에 왕과 왕비를 보필하는 임무를 담당하며 국가로부터 정식월급을 받고 일한 이들, 궁녀들은 조선시대 최초의 전문직 여성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조선시대 국왕의 혼례 절차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라 준수되었는데, 그 과정은 대략 이러하다. 우선 왕의 혼인이 결정되면 '가례도감(家禮都監)'이라는 임시 관청을 설치하고 전국에 금혼령(禁婚令)을 내린다. 가례도감은 왕의 혼례를 주관하는 관청이고, 금혼령은 왕의 배우자가 될 만한 연령에 있는 처녀들의 혼인을 금하는 명령이다. 금혼령이 내려지면 처녀를 둔 가문에서는 조정에 보고해야 했는데, 이 보고서를 '처녀단자(處女單子)'라고 한다. 이 단자에는 처녀의 사주(四柱)와 거주지, 그리고 부·조·증조·외조의 이력을 기록하여 가문 내력을 알 수 있도록 했다. 처녀단자를 접수한 왕실에서는 이를 기초로 3차에 걸쳐 선발했는데, 초간택(初揀擇)·재간택(再揀擇)·삼간택(三揀擇)이 그것이다. 간택은 대체로 왕실의 어른인 대비가 주관했는데, 왕비 감을 미리 내정해 놓고 간택한 경우가 많았다.
조선의 온 땅과 만 백성을 주관한 국왕도 자신의 배우자만큼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었으니, 요즈음 젊은이들의 연애 풍속도에 비추어 보면 국왕도 부럽지 않은 측면도 있다고 하겠다.보통은 왕의 자식을 낳은 후궁들이 내명부의 직첩을 받았다. 그렇지만 후궁이 예쁘고 마음에 들면 왕은 그 여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내명부의 직첩을 내리기도 하였다. 때문에 왕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이를 기화로 권세를 흔들던 후궁들도 적지 않았다. 연산군 시절의 장록수, 광해군 때의 김개시, 숙종대의 장희빈 등은 왕의 후궁으로서 일세를 풍미하던 여인들이라 하겠다.
그러나 후궁들에게 부귀영화만 주어졌던 것은 아니다. 만약 자신이 모시던 국왕이 죽고나면, 그녀는 개가를 할 수도, 다른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질 수도 없었다. 죽을 때까지 수절해야만 했다. 왕을 모시던 여성들은 나라에 모범을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들만이 국왕의 아이를 잉태할 수 있고, 국왕의 아들만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 후궁들이 국왕 이외의 다른 남자와 동침한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였을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국왕과 혈통이 다른 사람이 왕위를 계승한 꼴이 되므로, 그 왕조는 생명력과 정통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 단적인 예로써, 고려 말 이성계세력이 공민왕의 아들 우왕과 창왕에 대해 왕씨(王氏)가 아니라 신씨(辛氏)라는 이유를 내세워, 그들을 폐위시켜 사실상 고려왕조를 종식시킨 사실을 들 수 있다.
조선시대의 왕비는 왕이 사망한 이후에도 계속 대궐에서 살았다. 자식을 낳은 후궁들의 경우에는 장성한 자식들과 함께 살 수 있었다. 문제는 자식도 없이 갑자기 과부가 된 후궁들이었다. 이들은 대개 여승이 되었는데, 수절을 하면서 죽은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함이었다. 조선초기 과부 후궁들이 머리를 깍고 모여 있던 절이 바로 정업원(定業院)이라는 곳이었다. 그 이름의 의미가 재미있다. "업(業)이 정해져 있는 사람이 사는 집이다"라는 뜻이다. 그 업이란 바로, '국왕을 모실 수 있는 기쁨'과 '국왕만을 모셔야 한다는 족쇄' 이 두 가지 모두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 궁녀
구중 궁궐 안에서 국왕 일가의 시중을 전담하던 여인들, 이들이 바로 궁중의 꽃이라 불리던 궁녀다. '대전 회통'에 의하면 궁녀란 궁중 여관의 별칭으로 상궁 이하의 궁인직, 즉 궁중에서 일하는 여성 관리들을 뜻한다. 일반적으로는 상궁과 나인만을 의미하지만, 넓게는 그 아래 하역을 맡은 무수리·비자·의녀(醫女)등이 모두 포함된다. 무수리는 각 처소에서 막일을 담당하던 여인들로 민간의 아낙네들이었다. 무수리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은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로, 무수리로 궁중에서 지내다가 숙종의 은총을 입어 숙빈의 지위에까지 올랐던 여인이다. 무수리가 통근을 하는데 반해, 비자는 붙박이로 각 처소 혹은 상궁의 살림집에 소속된 하녀를 일컬었으며, 마지막으로, 의녀는 일명 여의사로서 궁중의 내의원에 소속돼 있던 사람이었으나 여순경의 역할과 잔치 때 무희의 역할도 겸했다.
1) 궁녀의 부서
①지밀 :
지밀이란 가장 지엄하고 중요하여 말 한마디 새어 나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왕과 왕비가 거처하는 침전과 안사랑, 대청 등이 있는 곳에서 근무하며 왕과 왕비를 보필하는 가장 중요한 업무를 맡은 핵심 부서.
②침방 :
왕과 왕비의 옷, 이부자리 등을 만들었다.
③수방 :
의복 등 궁중에서 소요되는 장식물에 쓰이는 수를 놓는 부서
④생과방 :
음료와 과자를 만드는 부서
⑤소주방 :
안소주방은 조석 수라를 관장했으며, 밖소주방은 잔치 음식을 만들었다.
⑥세수간 :
왕과 왕비의 세숫물과 목욕물을 대령하고, 지(요강)·타구·매화틀(변기) 등의 시중을 담당했다.
⑦세답방 : 빨래와 다듬이질, 다리미질, 염색까지 그 뒷손질을 담당했다.
2) 궁녀도 직급이 있었을까?
궁녀와 후궁을 포함해 궁궐에서 근무하는 여인들을 내명부라고 했는데, 맡은 일에 따라 품계가 나눠져 있었다. 고려에서는 왕의 적처(嫡妻)를 왕후라 하고, 그 후궁은 부인(夫人)이라 하여 중국의 천자와 대등한 호칭을 하였으며, 후궁인 부인들에게는 내명부(內命婦) 벼슬인 귀비(貴妃) ·숙비(淑妃) ·덕비(德妃) ·현비(賢妃)의 명칭과 정1품의 품계를 주었는데, 이 명칭은 정종(靖宗) 이후 궁주(宮主) ·원주(院主) 또는 옹주(翁主) 등 개칭이 빈번하였다. 고려에서 후궁이 많았던 왕으로는 태조로서, 그는 건국과정에 호족(豪族) ·공신(功臣) ·귀화귀족(歸化貴族)들을 회유하기 위한 혼인정책으로 제1왕후 외에 제6비까지를 왕후라 부르고 부인이라 칭한 후궁만 20명이 넘었다.
조선시대에는 중국 제후국(諸侯國)의 예(禮)를 뚜렷이 하여, 왕의 적처는 후(后)라 하지 않고, 격하하여 비(妃)라 하고, 후궁들에게는 내명부의 벼슬을 주어 숙원(淑媛:종4품) ·소원(昭媛:정4품) ·숙용(淑容:종3품) ·소용(昭容:정3품) ·숙의(淑儀:종2품) ·소의(昭儀:정2품) ·귀인(貴人:종1품)의 순으로 올리고, 후궁의 으뜸은 빈(嬪:정1품)이라 하였다. 이 빈에는 처음부터 왕의 후사(後嗣)를 위하여 왕비나 세자빈과 같이 금혼령(禁婚令)을 내리고 간택하여 들어오는 경우와, 궁녀로 들어왔다가 왕의 총애를 입어 왕자를 낳고 궁녀에서 소용 ·숙의 등을 거쳐 빈으로 승격되는 경우가 있다. 경종(景宗)의 생모인 장희빈(張禧嬪) 등 선원보(璿源譜)에 올라 있는 역대 빈들은 거의 후자에 속한다. 조선시대의 후궁은 규정으로만 하여도 숙원에서 빈까지 8명에 이르나, 태종 ·세종 ·성종 ·선조 ·영조와 같이 치적(治績)이 뚜렷하다고 후대에 인정받은 왕들은 후궁의 수가 많아, 이들에게는 자녀를 낳은 후궁이 9명이었고, 자녀를 낳지 않아 선원보에 오르지 않은 여인까지 합하면 몇 명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3) 궁녀도 월급을 받았을까?
궁녀들은 여성 관리였기 때문에 나라의 녹봉을 받았다. 매월 정기적인 보수로 쌀 세 말과 그외 옷감 등도 특별히 하사 받았다고 전해지는데, 기록에 의하면 돈으로 월급을 받기도 했다. 순종때 지급됐던 월급명세서를 기준으로 환산해 보면, 당시 가장 높은 보수였던 196원은 지금의 화폐가치로 계산할 때 약 150만원 정도에 해당된다. 궁녀들은 맡은 업무와 연차, 품계에 따라 월급을 차등 지급받았던 여성공무원이었던 것이다.
4) 궁녀가 되려면?
왕을 가까이서 모셔야 하고 또 왕의 여자가 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궁녀의 선출 조건은 까다로웠다. 궁녀는 각 부서별로 그 나이가 달랐는데, 지밀은 4,5세,침방과 수방은 7,8세 그외 부서는 13세 미만으로 어린 나이에 뽑혀 들어왔다. 궁녀의 출신성분은, 조선 초기에는 관청의 여종이나 기첩의 소생있었으나, 점차 양가집 규수들이 궁녀로 선발되게 되면서 이에 따라 조혼 등의 폐단이 생기기도 했다.
5) 거쳐야 할 절차
궁녀가 되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할 절차가 있었는데, 바로 처녀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12,13세의 당시로서는 성숙한 나이의 경우에만 실시하던 것으로 앵무새의 피 한 방울을 팔에 떨어뜨려 피가 묻지 않으면 처녀가 아니라 해서 탈락시켰다.
6) 궁녀의 생활
궁궐에 들어와 15년이 지나면 견습 나인들은 관례식을 치르고 정식 나인이 되었다. 이때부터 궁녀로서 본격적으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관례식은 곧 성인으로 독립하는 것을 의미했는데, 궁녀에게는 이 관례가 사실상 혼례이기도 했다. 궁녀는 왕을 위해 평생을 살아야 하는 여인이기 때문에 왕에게 시집가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를 가졌던 것이다. 관례식을 치른 궁녀는 스승 상궁으로부터 독립해 두명씩 짝을 지어 한방을 쓰며 살았는데, 동거하는 궁녀들끼리 간혹 동성연애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7) 궁녀들의 최대 희망은?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와 평생을 갇혀 지내는 궁녀들, 그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희망사항은 바로 승은을 입는 것, 즉 왕과 성관계를 갖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왕의 총애를 받아 승은을 입게 되면 시중을 드는 입장에서 시중을 받는 입장으로 그 위상은 물론 대우가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후궁 역시 왕비처럼 간택을 해서 뽑기도 했는데, 궁녀들은 일의 특성상 왕을 가까이 할 기회가 많기 때문에 간택 절차를 거치지 않고 바로 후궁이 될 수 있었다. 궁녀가 승은을 입고 왕자녀를 낳게 되면 종4품 숙원에서 높게는 정1품의 빈, 즉 후궁의 자리에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5,6백명의 수많은 궁녀들 사이에서 왕의 눈에 띄어 총애를 얻는 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왕의 승은을 입는 것은 궁녀가 권력을 손에 쥘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8) 궁녀로서 가장 높은 지위에 올라간 여인들
궁녀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이들은 바로 왕의 승은을 입어 왕세자를 출산한 여인들이었다. 서울 궁정동 청와대 경내에는, 이러한 여인들의 사당을 모셔놓았는데 이곳이 바로 칠궁이다. 후궁이 낳은 왕들이 종묘에 들어갈 수 없었던 자신들의 생모를 기리기 위해 만들었던 곳이다. 이곳의 모셔진 위패의 주인공들로는 진종의 어머니인 정빈 이씨,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 장희빈으로 더 유명한 경종의 생모 희빈 장씨, 원종의 생모인 인빈 김씨, 비운의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귀비 엄씨 등이 있다.
9) 상궁의 지위는?
상궁은 왕의 측근에서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으며 그 영향력도 커 정승들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특히, 어명을 받들고 내전의 재산을 관리했던 수백 궁녀의 장인 제조 상궁은 정치적으로도 그 영향력을 발휘하는 위치에 있기도 했다. 권력의 최측근에 서 있던 궁녀, 그들은 궁 안의 또다른 실세로 자리하고 있었다. 궁녀가 궁에 들어와서 상궁이 되는데는 원칙적으로는 30년에서 35년의 세월이 걸렸다.
10) 상궁의 직위와 명칭은?
①제조상궁 :
일명 큰방상궁이라 하며 수백 궁녀의 장이다. 물론 한 사람뿐이며 대전 어명을 받들고 내전의 대소사를 주관하므로 학식이 많고 인물도 빼어나야 했다.
②부제조상궁 :
제조상궁 아래의 차석으로, 내전 금고를 관리했다.
③시령상궁 :
잠시도 왕의 곁을 떠나지 않고 항상 어명을 받들 자세로 대기했기 때문에 지밀 상궁이라고도 했다.
④보모상궁 :
왕자녀의 양육을 맡은 내인 중의 총 책임자였다.
⑤시녀상궁 :
시녀 상궁의 임무는 궁중 지밀에 여러 가지를 봉사하는 것이었으며, 이밖에도 일반상궁들이 많이 있었다.
11) 궁녀의 말년은?
이렇게 외부와 단절된 채 한평생을 궁궐에서 지내온 궁녀들은 나이가 들어 병이 들면 궁궐에서 나와야 했다. 마땅히 의지할 곳이 없었던 궁녀들에겐 또 하나의 어려움이었다. 서울 은평구 갈현동의 궁말은 궁녀가 모여산 마을이라고 해서 궁말이라고 불리웠던 곳으로, 궁궐에서 나온 궁녀들은 이렇게 마을에 모여 살기도 했고, 절에 시주하며 만년의 쓸쓸함을 달래기도 했다. 규율과 법도에 얽매여 외부와 차단된 채 외롭고 쓸쓸한 생을 보내야 했던 궁녀들. 어쩌면 이들은 봉건적인 왕조 사회의 희생자였다. 그러나, 여성의 활동이 제약받던 시기에 왕과 왕비를 보필하는 임무를 담당하며 국가로부터 정식월급을 받고 일한 이들, 궁녀들은 조선시대 최초의 전문직 여성들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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