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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놈들아 다 죽여버려라 하는 마음으로~찌지직(방송끊김) 본문

.....Live(삶터)

그래 이놈들아 다 죽여버려라 하는 마음으로~찌지직(방송끊김)

AziMong 2008. 6. 28. 01:39

시청앞에서 라디오21 천막을 철거할때의 노혜경씨의 멘트는 이랬다.

 

" 지금 저희 라디오 21천막앞에 전경들이 도열하기 시작했네요. 저희 부스는 아주 조촐~합니다. 방송하는 저하고, 옆에 여성분 한분 이렇게 두명 달랑이지요. 전경은 부대가 대거 출동해서 바로 2미터앞에 섰군요~아네~ 이것도 철거라고 강제철거 난생처음 당해보는데 조금 떨리네요. 히히~

 

떨지 말아야지~히히. 저 전경애들 참 순진하고 착해보이는데 불상사는 없얼거 같아요. 근데 난 왜 이런 비상상황에도 자꾸 웃음이 나오죠? 저애들 사실 다 내 아들하고 같은 나이네요. 아참~촌스럽게 날씨는 이렇게 더운데 애들덥게 왜 저렇게 까만옷을 입히지. 정말 촌스럽네. 히히~ 자꾸 웃음이 나와요. 제가 원래 이래요. 이런 상황에서도 웃게되니....

 

지금 북핵사태는 냉각탑폭파와 미국측의 교역금지 해제로 미국과 북한이 통하는 통미봉남으로 가는데 한국만 왕따 됐네요. 정말 한심합니다. 이걸 도대체 어쩌려는지 무슨생각인지 도대체 이해가 안돼네요. 한심하다 못해 울분이 치솟네요."

 

시간이 흘러 진압명령이 떨어질때까지 한 30분이 넘게 떨리는 목소리로, 노혜경씨는 저항과 시민불복종의 역사적 법률적 개념에 대해 차분히 설명하더군. 그러더니 전경이 앞으로 다가왔다. 와이브로는 뽑혀졌고, 화면은 나갓으며 전경들의 얼굴은 점점 가까워져 클로즈업 됐다. 밀고 들어 온것이었다. 이때 끊어진 항상 명랑하던 노혜경씨의 떨리는 마지막 멘트는 이랬다.

 

" 네 지금 전경들이 밀고 들어옵니다. 우리야 다쳐도 수술하면 되지만 방송장비 이거 아주 고가라 다치면 안 되는데..... (차분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지난 20년전 전두환 정권때 제가 항의 시위를 하고 있을때 저는 임신중이었고 만삭이었어요. 그때 무자비한 전경들이 진압할때, 그래 이놈들아 다 죽여버려라 하는 마음으로~찌지직(방송끊김)"

 

노혜경
출생
1958년 9월 9일
출신지
부산광역시
직업
정치기관단체인
학력
부산대학교
경력
2005년 10월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 대표
2004년 8월~2005년 7월 대통령비서실 홍보수석실 국정홍보비서관

 

 

 

이 시집을 거론하기 전에 캣츠아이(cat’s eye)가 무엇인지부터 알아보자.


묘정석(猫睛石)이라고도 한다. 황록색에서 청색까지 여러 종류가 있으며, 대부분 반투명하다. 금록석(金綠石)에 속하는 것과 섬유상 광물이 가정(假晶)을 이룬 석영(石英)에 속하는 것의 두 종류가 있다. 금록석에 속하는 것은 담녹색으로 반투명하고 변채(變彩)를 가지며, 방향에 따라 아름다운 청회색이 이동한다. 1급 보석으로, 스리랑카 ․인도에서 많이 산출된다. 동양묘안석 또는 진정묘안석(眞正猫眼石)이라고도 하는데, 일반적으로 묘안석이라고 하면 대부분 이것을 말한다.


그리고 시인이 표사를 대신하여 쓴 뒷표지 글부터 들추어 봐야 그의 시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요소를 무엇인지 깨닫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노혜경 시인만큼 자신의 세계를 적실히 밝혀놓은 시인도 드물지 않던가.


시집의 제목을 정하느라 하염없이 시간이 흐른다. 두번째 시집을 내고 난 뒤 세번째 시집은 당연히 [엄마와의 전쟁]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레이스마을 이야기 그 신화적 결론을 내린 뒤에도, 마땅히 밟아야 할 계단을 덜 밟았다는 진도에의 욕망 또는 결여의 느낌 때문에 끝없이 엄마에게로 되돌아가는 내 습관이 무서웠고, 그래서 끝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이미지는 또 다른 이미지를 낳고 이미지가 스스로 새끼를 쳐 다른 사유로 이끌었다. 한 번 집을 나온 뒤 거듭 갈라지고 이어지는 길 때문에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린 여행자의 이미지가 이 시집 전체에 걸쳐 되풀이된다. [집을 나섰으므로]는 그렇게 생겨난 제목이다.


내친 김에 가보자. 그래서 닿은 곳이 [캣츠아이]였다. 캣츠아이의 그 놀라운 광채는 이물질을 어떻게 받아 안는가에 따라 생겨나기도 하고 그냥 쓰레기의 띠로 버려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 이미지가 갑자기 특별해졌다. 내 안에서도, 빛으로 승화되기까지 무수히 많은 다른 영혼들의 죽음, 아니 버려짐이 있었으리라. 이 특별한 보석은 언제나 둥글게 세공을 해야 한다. 그래야 그 빛의 띠가 가장 아름답게 빛난다. 그러나 둥글다는 것, 제 몸의 표면적을 한껏 줄여야만 된다는 것은 엄청난 양보와 참을성을 요청한다. 그리하여 캣츠아이란 이미지는 내 안에서 빛나려고 애쓰는 영원한 타자성의 상징이 되었다. 나는 최대한 나 자신을 움츠려 둥글게 둥글게 말려야만 하고, 엄청난 상처와 고통을 참아야만 하고, 타자를 받아 안아 빛나게 하기 위해 오래 스스로를 응축시켜야만 한다는 것, 인류공동체의 모든 성취의 아픈 상징인 듯, 심장의 돌인 듯.


[집을 나섰으므로] 와 [캣츠아이] 사이에서 방황을 했다. 말을 내 안으로 던져놓고 기다리기로 했다. 이미지는 스스로 사유하는 힘이 있으므로, 어느 말이 나를 사로잡는가를 보기 위해서다. 그리고 [집을 나섰으므로]보다는 [캣츠아이]가 휠씬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캣츠아이]는, 사람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이미지다. 이 이미지가 내게로 왔다는 사실이 축복이라 느끼면서, 이제 새로운 시집을 내 놓는다. 세상과 나를 한줄기로 꿰고 싶은 욕망을 충족시키는 빛나는 돌, 너와 나를 이어주는 집이기도 하고 길이기도 하고 새로운 시간이기도한 [캣츠아이]가 베푸는 사유와 인식과 상상력의 힘을 나처럼 당신도…

- [뒷표지글] 전문


  노혜경시인의 세번째 시집 캣츠아이는 엄마와의 전쟁을 이야기하고 있다. 다른 차원에서 보면 서사구조로도 이루어져 있으나, 자연스런 상상력의 분출로 이루어진 환상적 이미지의 시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즉 남성권력 아래에서 억압된 자아를 자연발생적이고도 역동적으로 분출되는 상징적인 이미지로 축조되어 있다. 시인은 엄마와의 전쟁으로 여성의 정체성과 균열을 찾아내어 감내하고 끄집어내는 내면화된 상상력으로 엄마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뒷표지글에서 나타냈듯이, 그녀는 “끊임없이 엄마에로 되돌아가는 습관이 두려웠던 것”이다 무의식에서 발생하는 요소이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며, 그래서 집을 나설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어두운 숲에 초록의 빛나는 돌의 길이 있었다.

엄마는 숲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하였지만, 머뭇대며, 소녀는 따라갔다. 엄마의 손을 놓고 깊숙이. 초록의 빛나는 돌의 길, 그 끝에 동굴이 있다는 걸 우린 모두 알고 있다. 기묘한 슬픔의 빛깔, 반짝이는 초록, 지구의 심장에서 길어 올린 돌들이, 모든 소녀들에게 숲을 보여주지만, 길은 금지되어 있다. 어두우므로 그 길로 가지 말라고 엄마는 말했다.


소녀는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울리는 제 발소리에 겁을 먹는 발자국들을 데리고, 오래 걸어, 수많은 흔적들 가운데 또 하나의 흔적처럼 되어버린 자기 발자국을 구별할 수 없을 때까지.


사람들은 말한다, 소녀가 사라진 것은 도둑 때문이라고. 집에서는 엄마가 울고 마을엔 방이 붙는다. 한 손에서 다른 손으로 건너가야 할 보물이 사라졌다고.


소녀는 옷가지들을 벗으며, 덩달아 제 몸피가 벗어지는 것을 따라 벗으며

조금씩 피가 흐르고, 유방이 솟고

길에다 살점들을 조금씩 떼어놓는다


식인종이 소녀를 구하고, 소녀는 되돌아와 왕비가 되고, 마을 바깥의 숲에는 초록색 돌들이 감추고, 소녀들은 숲에서 금지되고, 동굴은 무너지고, 그리고 발자국들은 말한다, 우리가 마지막이 될 거라고.


그러나 돌은 소녀에게 보여준다 그 모든 어둠을 합친 것보다 더 어두운 소녀의 얼굴 돌의 비명보다 더 크게 울리는 소녀의 발자국소리 돌아오지 말고 곧장 가라는 쿵쿵거리는 심장소리 그리고 소녀는 들어간다 더 깊이 더 깊이 동굴의 끝까지


되돌아 나오는 방법을 잃을 때까지 모든 살점을 험악한 바위들이 핥아먹고

피비린내가 죽은 시간들의 비린내에 섞이고

소녀는 키가 커서 동굴벽을 가득 채우고


저 아래로

저 깊은 데로

마침내 낮게 고인 초록 물의 바다에 가 닿을 때까지

- [집을 나섰으므로] 전문



  엄마는 딸들에게 하지 말아야할 것은 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것이 여성의 길이라고 말하지만, 소녀는 숲속의 동굴 깊숙이 들어간다. 다시 “되돌아 나오는 방법을 잃을 때까지” 엄마가 되지 않으려 한다. 억압된 요소로부터의 끝없는 탈출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억압받는 내면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상징적 요소로 동굴, 거울, 우물의 이미지를 빈번하게 끌어들이기도 한다.


하늘이 맑은 날 우물 안을 들여다보면 나뭇잎 맴을 돌 때마다 일렁이는 내 얼굴이 보이죠. 그 작고 동그란 하늘이 내 등뒤로 한없이 깊어 눈이 부시죠. 나는 하늘을 똑바로 보기가 싫어 대숲자리 우물에 가서 그 묵은 공기를 들여 마시곤 했더랬죠. 우물, 죽은 쥐와 개구리들을 던져 넣은 날 밤에, 우물의 벽에 동굴이 열리고 낡은 감옥의 창살이 비죽이 달빛에 빛나는 것을 꿈인 듯 생시인 듯 보았죠. 그 길로 집을 나와 다시 못 들어간 건, 무서웠던 것인지 나도 모르겠어요.

- [다가가 우물 속을 응시하다] 전문


시인은 세상을 향해 열린 마음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우물에 비친 하늘만을 응시한다. “하늘이 맑은 날”이란 표현은 포장된 일면의 진실만을 말할 뿐이다. 우물의 진실은 내면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는 것을 시인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긴 툇마루를 따라 걸어 들어가면 옛날 집 부엌

검은 녹이 슨 채로 아직도 가마솥이 걸려 있고

아궁이엔 재가,

그을음은 여전히 코끝에!


눈물을 찔끔 흘리며 찬장 서랍을 열면

오래 닫아두었던 먼지 냄새와 죽은 어미쥐


아, 그것뿐인데,

기억은, 저절로 봉합되는 걸까, 그 낡은 집

부엌에서부터 지워져 서서히 툇마루로

뒷걸음질쳐서 어제로, 오늘로, 내일로


모조리 지워지는

그 낡은 집


어둠이 그 투명한 손을 들어

내 심장을 열고, 그리고 죽은 쥐의 시체를 끄집어낼 때까지


열두 마리의 꼬물대는 새끼쥐들을 조용히 닫아두었던

맨마지막 서랍

- [맨아래 서랍] 전문


은폐된 세계, 현실의 허상과 사이에서 진실을 찾기 위한 시인은 결국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어둠이 그 투명한 손을 들어 내 심장을 열고 그리고 죽은 쥐의 시체를 끄집어낼 때까지 싸우겠다는 비장한 각오만을 다질 뿐이다.


어둠은 길고 긴 동굴로 변한다

끝이 있는 동굴, 분명히 오른쪽 위로 비스듬히 올라가는 경사로

그 길을 한 남자, 나를 캄캄한 밤으로부터 되돌려내 줄

오르페우스가 가고 있다


이 전설을, 또는 신화를 나는 이미 알고 있어,

나를 다시 어둠 속에 처박아도 되는 당신의 면죄부를


저 멀리 동굴 어귀의 눈부신 아침이 보인다

당신의 목뼈, 뒤돌아보려는 열망에 돌쩌귀 소리를 내는 그 목뼈


안 돼, 돌아보지 마, 울부짖기 위하여 내 목구멍은 소리를 내고

내 안의 여자가 나를 황급히 찢고 나온다

오래 이 내리막을 굴러, 이젠 피투성이가 되어 지옥에서 되돌아오는 여자


신화는 다시 쓰여진다

나는 한 번 당길 때마다 스물네 발씩 나가는 기관총을 손에 든

에우리디케-니키타

당신이 만든 살인기계


오르페우스, 내가 나를 다시 쓸 때

등뒤의 여자, 보이지 않으므로 없는 그 여자

스물네 발 다연발 기관총을 들고

당신의 등뒤를 따라가고 있지


이제, 사랑하는 그대여

동굴 밖으로 나가 보실까?

절대로,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얼굴을 가지고 싶거든.


* 그리스 신화에서 오르페우스는 산 채로 저승으로 가서 음악의 힘으로 에우리디케를 구해오지만, 결정적으로 뒤돌아보지 말라는 명을 어기고 돌아옴으로써 아내를 다시 잃는다. 한 남자의 뒤돌아봄에 생사가 메어 있는 에우리디케, 영화에서 살인기계로 길러진 여성 니키타는 그 종속적 운명을 거역하기 위하여 이 시에서 에우리디케니키타로 재창조된다


- [에우리디케니키타] 전문


집을 떠났으므로 내 안의 나를 황급히 찢고 나온다. 내 안의 여자가 나를 찢고 나와야 “신화는 다시 쓰여”질 수 있는 것이다 신화처럼 남성중심적인 그 틀을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신화의 여인과 살인기계의 합성으로 에우리디케니키타가 재창조되는 것이다. 새로운 주체는 여성의 몸을 통해서 시작되고 소멸된다는 사실에 시인은 주목하고 싶은 것이다.


거기, 낡은 곳간의 문을 따고 들어가면, 선반 위에 조롱조롱 엄마의 목이 걸린 것을 볼 수 있다. 피에 푸욱 절어, 때로는 잘 말라 뺨이 옴폭한 채로 여러 겹 바른 벽지처럼 무늬를 알 수 없는 미소 띤 얼굴로, 엄마가, 벽걸이 장식 같은 엄마가 있다. 엄마의 죄는 무겁고 검어서 선반은 휘어져 있고, 엄마의 눈은 어둡고 달콤한 빛으로 끈적인다. 못 올 곳을 왔구나, 라고 쉰 목소리가 말한다. 여기는 엄마들의 콜로세움이란다, 낡은 곳간, 새로운 밥을 지을 수 없는 텅 빈 시체들의 장소, 왜 여기까지 왔니, 딸아, 하고 엄마들이 말한다. 나는 벌써 너를 죽여 우물에다 묻었는데, 어떻게 이곳까지 왔니, 하고 엄마가 말한다. 엄마, 엄마에게 배울 것이 있어서 왔어요. 나는 아기들로 가득 찬 주머니를, 나의 부풀어 오른 배꼽 아래 방을 보여준다. 여기, 이 알 수 없는 것의 운명을 엄마에게 물으러 왔어요. 엄마의 일이 왜 내게로 왔는지 물으려고요. 열쇠는 우물 속에 있고 손도끼는 엄마가 가졌는데, 내 이 두 손이 뼈가 드러나도록 문을 두드려 열고 들어왔지요, 엄마에게 물으려고요. 동굴 속처럼 마른 엄마의 목소리가 말한다.


파묻어라, 너와 닮은 아이를, 이제 막 낳아 탯줄 끊어진 아이를, 쥐들만이 둥지를 트는 어두운 곳간의 구석 몇 백 년 묵은 쌀기울 먼지가 침낭처럼 무덤처럼 수도원처럼 배를 열어 조용히 아이를 안아줄 터이니

배고파 우는 아이는 어서 굶겨 죽여야 하고 말 안 듣는 아이는 허리끈으로 목을 조르고 강간당한 여자는 다시 돌로 쳐죽여야 한다고

멀리서 전쟁이 말하기 전에


엄마가 자기 목을 도로 잘라 선반 위에 걸어둔다. 엄마의 배에 뚫린 구멍 속으로 기차와 고함소리가 드나든다. 엄마의 낡은 몸이 자꾸만 바닥으로 쏟아진다. 쌀기울 먼지가 되어 구석으로 쓸려 간다. 나는 엄마의 목을 집어들어 가슴에 안는다.

- [3장 지하실의 곳간] 전문


엄마와 딸의 관계는 알 수 없는 운명에 사로잡혀 있다. 지하실의 낡은 곳간에서 재생을 꿈꿀 수밖에 없는데, 엄마는 딸에게 “새로운 밥을 지을 수 없는 텅 빈 시체들의 장소, 왜 여기까지 왔니” 라고 말한다. 게다가 “나는 벌써 너를 죽여 우물에다 묻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세계는 생명의 가치가 실종된 채 이미 파괴와 살육이 자행되는 그로테스크한 현실일 뿐이다. 딸은 다시 엄마로 되돌아가는 습관을 두려워하며 그 방법을 묻는다. 이러한 재생 불가능의 현실에서 시인은 어머니의 몸 속으로 다시 들어가 “나의 부풀어 오른 배꼽 아래 방”의 존재 이유를 묻는 행위를 통해 새로운 여성 주체의 탄생을 도모하고자 하는 시적 전략을 보여주고 있다.


잘려진, 당신이 잘라낸 내 머리가 선반 위에 얹혀 있다

그 입술에선 아직도 웅얼대는 소리가 새어 나온다

침묵하라

는 당신의 명을 어긴 죄로 잘려진 머리


당신은 내 머리채를 쥐고 벽에다 던진다/아니 패대기친다

당신은 �찌로 내 이빨을 뽑는다

당신은 내 얼굴을 해체하고, 내 이마 위로 새로운 이름을 새긴다

침묵의 입이라고 새긴다


그러나


내 입안의 동굴이 점점 커진다

동굴 속에서 소리가 울려 나온다


다인은 결코 내 웅얼거리는 소리를 멈출 수 없다

내 소리는, 한때 나와 하나였던 땅의 심장에서 울려나오기 때문에

캣츠아이, 빛이 없어도 빛나는 돌의 심장에서

나는 말하기 때문에!

- [캐츠아이 잘려진 머리] 전문


여성 내면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상징 중 하나가 동굴이다. 동굴은 점점 커지고 속에서 소리가 울려나온다. “빛이 없어도 빛나는 돌의 심장”을 가진 “캐츠아이”는 바로 이러한 윤리적 주체로서의 여성의 몸을 상징화한 것이다.


이 바다는 세상의 끝, 갑자기 깎아지른 벼랑에서 스스스 스스스 지구는 모래가 되어 날리고 엄마는 혼자 몸을 찢어 젖은 것들을 안고 솟아오르며 천천히

바다 위로 축축이 떡갈나무 잎 타는 냄새가 퍼져 간다. 엄마의 어깨가 해안선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있는 힘을 다해

늘어난다. 안개,엄마의 찢어진 팔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낮게 깔리는 엄마의 아픈 숨소리, 엄마의 배꼽을 관통하는 바다의 소리


물밑은 뒤집어지고 엄마는 자꾸 늘어나고


그러나 나는 한사코 잠들어 있고만 싶네

이 안락한 물의 잠, 깊이 깊이 가라앉아 다시 떠오르고 싶지가 않네


자꾸만 어두운 잠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내 몸을 파도가 벼랑으로 내다 꽂는다

내리덮인 눈꺼풀이 찢긴다

칼날 선 바닷가, 손을 대면 손이 먹히고 입술을 대면 입술이 먹히는 사나운

벼랑의 못으로, 바다가 나를 집어 던진다


엄마가 나를 받아 안는다, 안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빛,파도에 찔린 자리마다 새어나오는,

아가야, 너를, 너를, 너를,

너를 들여다봐


한사코,

- [캐츠아이 터져나오기] 전문


내면의 이물질로 인해 빛을 내는 보석이 ‘캣츠아이’다. 이러한 보석의 성질처럼 시인은 최대한 나 자신을 움츠려 둥글게 둥글게 말려야만 하고, 엄청난 상처와 고통을 참아야만 하고, 타자를 받아 안아 빛나게 하기 위해 오래 스스로를 응축시켜야만” 하는 내적 질서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즉, 세상과 나, 너와 나를 하나로 연결해주는 내적인 진실을 발견하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인 셈이다. 따라서 시인은 “캐츠아이란 내 안에서 빛나려 애쓰는 타자성의 상징이 되었다”([뒷표지글])고 고백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를 응축시켜 신생을 꿈꾸기 위한 시적 담화를 담고 있는 것이다.


대륙의 한 복판에, 역류하는 물들의 응어리가 고이듯

섬 하나가 고여 있다


나는 너무 커다란 오래된 육체

너무 익어 발효의 도가 넘은 몸


진흙 같은 몸이 무언가를 끊임없이 토해내고

내 얼굴은, 그 더러운 냄새를 맡아보려고 돌아눕는다

흙의, 분비물의, 썩어서 발효된 것들의 더러운 냄새를

나도 모르게 맡아보려고.


목덜미에서 금가는 소리가 들리며 목이 푸시시 부서져 나간다

내 몸이 파사삭 흘러내린다


많은 물들이 내 몸에서 흘러나와 끈적이는 진흙과 섞인다

축축한 혓바닥처럼 나를 핥고 있는

이 끈적거리는 곳에서 나는 왜 먼지가 되는 것일까, 라고,

내 몸의 껍질은 생각한다


유리창으로 빛처럼 희뿌연 가루가 들어온다

빛나는 가루들이 내 잘린 목을 완벽하게 나 자신과 갈라놓는다


나는 덜 무너진 신전, 나의 몸으로 되돌아간다

썩은 몸 어딘가에서 덩굴손이 자라고 있다


희고 고운 처녀 같은 긴 머리를 한 꽃이

썩은 신전으로부터 피어난다

- 빛의 가루3 [부패의 묘약] 전문


깊이 통찰해서 응축된 내면적 상상력 분출이 노혜경 시의 특징이다. 남성권력의 비판 시각보다는 여성의 몸의 복원이라는 차원에서 내면화되고 상징화되고 있는 것이 노혜경의 캣츠아이의 정체이다. 대지모의 상징인 여성의 몸처럼 이물질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보석 혹은 쓰레기가 되는 것, 홍채가 아름다운 고양이 눈 같은 보석이 되는 것이 바로 ‘캣츠아이’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그녀의 시는 비로소 신생을 꿈꾸는 주기로 환원한다. “빛나는 가루들이 내 잘린 목을 완벽하게 나 자신과 갈라놓는” 그 자리, “썩은 몸 어딘가에서 덩굴손이 자라나고”, “희고 고운 처녀 같은 긴 머리를 한 꽃이/썩은 신전으로부터 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노혜경의 시는 여성의 내면을 누구보다도 깊이 통찰해내는 아주 독특한 상상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막연하거나 관념적인 차원이 아닌 응축된 상상력의 분출이 저절로 그의 시를 육화하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노혜경 시인의 시 몇편을 더 올려본다



캣츠아이

미장원처녀



내 친구 숙이는 미장원처녀. 도시의 변두리, 지친 사람들이 밤늦게 돌아와 고단한 몸을 누이는 잠자리 곁에 그녀의 미장원이 있다. 우리가 어릴 적 꿈꾸던 마술거울이 걸려 있진 않지만, 들여다보면 늘 바쁜 아줌마들이 뽀골거리는 파마를 하고 있는 곳. 꽃무늬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서둘러 집으로 가는 거칠고 옹이진 손들 사이로, 그녀의 늙어 버린 엄마가 중고 미용실용 의자 위에서 잠들어 있다. 그녀의 사악한 남편이 미용실 바깥에서 서성이고 있다. 그녀의 잔인한 시엄마가 손지갑을 흔들며 그녀를 때린다. 그녀의 굶어죽은 딸이 거울 속에서 잠들어 있다. 그녀는 길게 담배 한 모금 내뿜으며 한 손으로 드라이를 한다. 숙이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산 여자. 고통이 그녀의 생을 종이처럼 접어 부피가 두터운 책으로 제본을 했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지 않는다. 그녀의 거울 속엔 지하실이 잇고, 그 지하실 낡은 찬장 속엔 우리가 만들고 잊어버린 수많은 얼굴들이 있다. 아직도 머리카락이 자라나는 그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 복숭아빛 뺨에 어울리는 둥근 타래머리를 하고 싶어요. 공주처럼 머리를 높이높이 올리고 싶어요. 사내아이처럼 앞머리를 자르고 싶어요. 거울 앞의 작은 소원들을 숙이의 거울은 하나도 남김없이 기억해 둔다. 숙이가 낡은 집 먼지를 걷어내듯 거울 속으로 들어와 내 얼굴을 만진다. 불이 오른다. 차가운 그녀의 손이 내 불타오르는 얼굴을 식혀준다. 부드러운 그녀의 손이 내 머리카락 사이로 노래를 흐르게 한다. 그녀의 죽은 딸이 내 무릎 위에서 놀고 있다. 그녀의 손끝 아래서 늙은 여자들의 메두사 같은 머리가 안식을 얻는다. 고생을 모르는 손은 그 뱀들을 만질 수 없다. 오직 그녀만이 뱀들이 노래 부르게 만들 수 있다.


  숙이는 미장원처녀다. 오래 오래 묵은.






반짝이는 밤



  일몰 뒤 순식간에 밀어닥치는 어둠을 감당하려고 엄마는 많은 등불을 준비한다. 갑자기 부풀어오른 해일이 아니라, 반드시 내릴 가랑비를 예비하듯이.

하루가 물러나간 자리에 어둠의 혀처럼 나를 핥아주는 엄마의 하얀 손. 어둠은 물보다 부드럽다 물보다 빈틈이 없다, 엄마의 손이 나를 둘러싼 어둠을 말끔히 닦아내기 전까지는.  


  밤에는, 세상을 반짝이는 것들로 가득 채우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둔 그늘이 있다.

  그 그늘 아래 엄마는 폭이 넓은 치마를 펼치고 앉는다.

  엄마가 바로 그늘이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치마 아래는 넓고 환하고

  엄마의 얼굴은 캄캄하다.


  백만 개의 등불이 출렁이고, 백만 사람의 얼굴이 반짝인다.

  죽어버린 영혼들을 꽃다발처럼 등불처럼 켜들고 엄마는 기나긴 밤을

  보내고 있다, 가서 다시 돌아오지 말라고.

  다른 아침으로 나가라고.


  아침 일찍 숲으로 나가면, 별들이 빠져나가버린 엄마의 치맛자락이 마른 가지들 위에 슬프게 걸려 있다. 나는 울지 않으려고 뒷걸음을 쳐서 다시 다시, 다시 밤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엄마가 모아둔 죽은 영혼들의 꽃다발인 별들, 그 반짝이는 환한 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단 하루의 밤, 엄마의 시간 속으로.






푸른 말



  푸른 보자기에 엄마는 수를 놓고 있다. 하얀 비단실로 엮는 것은 나의 길다란 팔과 다리. 검디검은 팔꿈치.

  파란 실로 그린 망아지 한 마리.


  이 망아지가 네 눈에 보이거든 너는 네 갈 길로 가라고 엄마는 말씀하신다. 나는 필사적으로 눈을 부릅뜨고 본다. 푸른 망아지는 보자기의 집이 너무 잘 들어맞는다. 엄마는 울면서 바늘끝을 찔러 얼룩을 낸다. 망아지는 조금 자라나, 발바닥에 그늘이 진다. 나는 손바닥이 다 벗겨지도록 쓸어본다. 푸른 말의 갈기가 언뜻 잡힌다. 나는 그것이 바람인지 말인지 알지 못한다. 엄마는 울면서 손목을 자른다. 푸른 말의 더운 콧김이 훅 끼친다. 나는 조용히 말의 잔등에 눕는다. 꿈속과 같은 고요한 박동, 쿵쿵거리는 심장, 그러나 나는 그것이 땅의 울부짖음인 줄 알지 못한다. 엄마는 울면서 목을 자른다. 엄마의 검은 머리털이 바다로 흘러들어 간다. 엄마는 울면서 배를 열고 가슴을 가르고 마침내 한 장의 보자기가 되어 눕는다.


  나는 바람처럼 별처럼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푸른 말이 된다.






캣츠아이

빵과 포도주



그대의 왼손 약지 끝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내 뺨에 깊다랗게 피고랑을 냅니다


이것은 내 피, 내 살의 균열

절대로 닦아서는 안 될 피라고


흐르고 흐르고 흐르고 흘러

피의 강물이 내 발끝을 적실 때까지


마침내 내 몸이 하얀 빵이 되고

복숭아가 되고

피의 강물 위에 떠 있는 하얀 배가 되어도


날카로운 칼날, 당신의 손가락

내 얼굴을 난도질하는 손길 멈추지 않아


나는 감히 손을 들어

그대의 뺨에 대어보려고


몸의 모든 기억을 다하여

그대의 뺨에 내 눈동자를 새기려고






캣츠아이 

노마 진, 기억속의 컬트 무비



  나는 오래된 극장에 홀로 앉아 있다


  플래시,

  흰 스크린이 천천히 어두워지면,

  하늘로 치솟는 스커트 자락 사이로 우연히

  얹힌 그녀의 얼굴이 보인다. 입술은 애써 열린다. 조그만 소리가 새어나온다. 개미.

  나는 바라보는 너희들의 눈동자의 개미!

  꽃무늬 스커트의 풍성한 주름이 조금씩 더 젖혀지는 틈새로 그 작은 개미들은 스며나온다.


  알고 보면 내 몸은 개미들의 집이었어, 수많은 시선들이

  갈갈이 찢어놓은 세포들, 그녀의 열린 입술에

  꽃무늬 이빨이 찍힌다, 입을 황급히 다문다, 플래시,


  하얀 스커트 자락이 하늘로 하늘로

  그녀의 다리가 무참하게 화면 밖으로 끌려나온다

  도대체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그 오랜 역사를

  얼굴, 잉여의 얼굴, 더 올라가 더 올라가 천장에 이마를 짓찧어

  하늘을 향해 거꾸로 떨어지는 피의 방울이 검은 화면에 구멍을 내는 것을

  남의 일처럼 남의 일처럼


  플래시,

  그녀의 몸은 이제 해체되고 없다, 이렇게

  나를 살해의 동업자로 남기고서

  내 눈동자로 들어온 그녀의 개미가 나를 찌른다, 내 눈물샘을 막는다


  아, 제발 기억해 줘, 너는 나를 잊었다는 걸

  나는 그냥 개미들의 집일 뿐이라는 걸.

  하늘에 걸린 그녀의 목이 그녀의 다리가

  피의 무지개를 그린다, 캣츠아이 루비, 우주의 눈동자의 핵심!






저녁 해의 노래



저녁 강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

흐르는 모래에 함께 흘러가는 노래를 들어요

손톱 끝에 스치는 바람을 마셔요


이렇게 많은 노래를 내가 불러주는데

네 심장은 왜 쿵 쿵 쿵 뛰지 않는 거냐고

파도가 한 번 무릎을 때리죠


붉디붉은 커다란 손바닥으로

하늘이 내 얼굴을 한 번 쓰다듬네요


하루의 딱 한 스푼만큼만

내 차지가 되는 극진한 고요의 복판에

내가 있고 당신이 있네요

나에게 들리지 않는 빛의 노래를 들려주려고

있는 힘을 다하여 강물에 투신하는

붉디붉은 그대가 있네요


저녁 강물에 손목을 담그고 앉아

흐르는 모래의 리듬에 몸을 맡기죠

풀어져 모래가 되죠






낡은 도시와 새로운 시민들의 합창



정다운 우리 나라, 지붕은 잠들고

거미줄에 새 이슬이 내리네요.

털 많은 다리를 부르르 떨며 어미거미가 잠에서 깨어나고

출렁대며 일순, 시작되는 시간.


부산스레 아침을 짓는 것은 메뚜기와 개미들

이런, 너무 오래된 기억 속의 낡은 풍경!


새로운 아침이 시작되었다네, 그러나

잠든 지붕 밑의 사람들은 아직 꿈이 덜 끝났나봐요

꿈속에서 아침을 먹고

꿈속에서 출근을 하고

꿈속에서 옹이 굵은 나무뿌리를 파내 멀리로 던지면

행복한 저녁이 오는가봐요


더 많은 꿈을 꿀 수 있다면 좋겠나요?

잠들지 못하는 그 많은 밤을 꿈과 바꿀 수 있다면 좋겠나요?

꿈의 입에서 자라난 끈적이는 실들이 말들이 뭉쳐서 꿈이 되고,

뭉쳐서 아이가 되고,

뭉쳐서 뭉쳐서 눈에 보이는 욕망이 되면

두 팔 벌리고 옥상에 서서 "다 이루었노라" 이야기하겠나요?


얘야, 옥상엔 난간이 없단다

넌 아직 발목도 없단다

이 높은 건물엔 알고 보면 지붕도 없단다

꿈의 어머니가 소릴 질러도 당신은 마냥 좋기만 한가요?


두 팔 벌리고 하늘을 향해 추락할 수 있나요?

당신은 꿈의 아들이어서 꿈의 거미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엄마가 당신을 따다가 앞치마에 담을 때까지 한없이

꿈의 하늘을 헤엄쳐 다닐 건가요?


오, 아무래도 그런 건 아냐, 꿈의 거미줄을 걷어내고

잠들었던 지붕밑, 갑각류의 잠을 걷어내고

당신은 낡은 심장을 꺼내어

핏줄까지 팔딱이는 튼튼한 벽돌을 빚습니다.

무너진 뼈들을 세우고 손을 맞대어 짓는

이 낡은 도시의 새로운 시민들의 합창. 

 

여자들은 아주 감성적이다. 아들과 임신, 그리고 20년전......그리고 20년후...그리고 죽음....

 

살기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