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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공동선언 10년, 남북 ‘햇볕’에서 ‘강풍’으로 본문
6·15공동선언 10년, 남북 ‘햇볕’에서 ‘강풍’으로
한겨레 | 입력 2010.06.14 20:30
[한겨레] 국민-참여정부, 공존과 교류로 군사적 긴장 완화
MB정부, 일방적 압박…북한 리스크에 불안 증폭
MB정부, 일방적 압박…북한 리스크에 불안 증폭
◇김대중·노무현 정부 '새 이정표'
6·15남북공동선언은 한반도 운명의 전환점이었다. 냉전과 반목, 불신을 넘어 남과 북이 스스로의 힘으로 교류와 협력, 상호 신뢰와 존중을 통한 통일의 대원칙에 합의했다. 남북 정상은 분단 사상 처음으로 직접 이 선언문에 서명함으로써, 정상 차원의 합의 이행 의지를 안팎에 천명했다. 2박3일의 화기애애하면서도 치열했던 토론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 정상 간의 만남과 신뢰쌓기가 어떤 역사적 돌파구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6·15 선언은 극적으로 보여줬다.
6·15 선언은 남북관계 발전의 기폭제가 됐다. 이를 계기로 이산가족이 정기적으로 만나는 기회가 열렸다. 이산가족의 뜨거운 상봉은 이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2008년 이전까지 단 한 해도 끊기지 않았다. 금강산 이산가족 면회소를 통한 상봉 정례화에도 성큼 다가섰다. 노태우 정부가 방북을 허용한 1989년 이후 11년간 1만1985명에 그쳤던 남북 왕래 인원은 2000년 한 해에만 7280명을 기록했고, 개성공단 가동 등에 힘입어 2008년엔 18만6775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1998년 11월 시작된 금강산관광도 6·15 선언 이후 우여곡절 속에서도 성장 토대를 쌓았다. 99년 14만8000여명이던 관광객은 2007년 34만5000여명으로 늘어났다. 또 하나의 접경지 경협 사업인 개성공단도 6·15 선언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준비를 거쳐 가동에 들어갔다. 2005년 7600여명으로 출발했던 개성공단 북쪽 노동자는 2010년엔 4만3000여명으로 증가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 남북관계의 거듭된 악화 가운데서도 마지막 버팀목으로서의 생존력을 과시하고 있다. 남북을 잇는 철도·도로도 새롭게 뚫렸다. 개성공단을 지나 평양으로 통하는 경의선과 금강산으로 가는 동해선이 열렸다. 이를 위해 군사분계선에 각각 너비 100m와 250m씩의 남북이 관리하는 통로를 닦았다.
6·15 선언은 또한 남북 사이 군사적 긴장완화의 출발점이었다. 2000년 9월 1차 남북 국방장관회담을 시작으로 교류·협력을 군사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군 당국간 회담이 이어졌다. 2002년 6월 2차 서해교전 직후 북쪽은 '핫라인'을 통해 의도적 도발이 아니라는 해명을 보내왔다. 1차 정상회담 때 설치에 합의했던 이 직통선을 통해 남과 북은 정상 차원의 의사 소통을 이어갈 수 있었다. 2004년 6월엔 2차 남북장성급 회담에서 '서해 우발충돌 방지와 군사분계선상의 심리전 중지' 합의가 이뤄졌다. 2009년 11월까지 남과 북 사이 서해상의 무력충돌은 다시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6·15 선언은 '전쟁 아닌 평화', '분단 아닌 통일'을 외세 영향을 벗어나 남과 북이 스스로 꿈꾸고 실현에 노력하게 만든 '담대한 희망'의 토대가 됐다. 남북관계의 나침반이 파국을 향해 흔들리는 지금, 역사적 이정표로서 6·15 선언의 존재 이유는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는 평가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이명박 정부 '시계 제로'
"정부는 상생과 공영을 대북 정책 방향으로 정립하고, 제대로 된 남북관계 발전을 추구했습니다."
통일부가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 2돌을 맞아 지난 2월 펴낸 < 대북정책 이렇게 해왔습니다 > 라는 책자의 첫쪽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러나 통일부의 이런 '자화자찬'을 믿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 초부터 내건 '비핵·개방·3000' 구상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방을 하면 10년 안에 1인당 국민소득을 3000달러로 만들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일방적인 양보를 전제로 한 비핵·개방·3000은, 표류를 거듭해온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에서 보듯이 현실성이 없어 사실상 용도 폐기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남북간 상생·공영의 원칙과 실천 방안을 담은 2000년 6·15선언과 2007년 10·4정상선언은 '대북 퍼주기'라며 사실상 인정을 거부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이 분기점을 맞은 것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건강 이상설이 불거진 2008년 8월부터라는 게 정설이다. 이때부터 이명박 정부는 북한 체제가 단시일 안에 무너질 수 있다는 '기대'에 함몰되기 시작했다. 접촉과 대화를 통해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려는 노력은 포기하는 대신, "기다리는 것도 전략"이라며 대북 압박을 강화한 건 이명박 정부의 기조로 볼 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단적인 예로, 2008년 7월11일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씨 피살 사건 이후 2년 가까이 중단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금강산관광사업에 대한 정부의 대응기조를 꼽을 수 있다. 통일부는 진상규명과 재발방지 약속, 관광객 신변안전 보장 등 이른바 3대조건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북한으로 현금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가 관광을 재개할 의사가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지난해 8월23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8월18일)를 계기로 북쪽의 특사조의방문단이 이명박 대통령을 예방해 한때 남북관계가 풀릴 듯한 기미도 있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대북 압박 정책으로 북한이 굴복했다는 인식 아래 기존의 대북 강경 정책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이명박 정부의 이런 대북 인식은 천안함 사건에 집약돼 있다. 지난달 24일 발표한 천안함 관련 정부의 대북 대응책엔 북한으로 들어가는 모든 현금과 접촉을 차단해 북한의 '항복'을 받아내겠다는 의도가 강하게 담겨 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은 한국경제의 '북한 리스크'를 부각시키는 등 국민들의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지난 10일 한 세미나에서 "이명박 정부가 북한의 정치·경제적 불안정, 굴복과 급변사태를 기다리겠다는 잘못된 정책으로 남북관계를 경색시키는 것은 결코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라며 "역사적 전환의 기회를 인식하지 못하고 역사적 흐름에 역행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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