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있는 뿌리깊은 이야기
창발상의 이론 본문
- 글쓴이
- 점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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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6-24 22:3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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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로마와 클레아투라 라는 터미놀로지는 융에 의해 먼저 언급된 것이고 베이트슨 및 여러 사상가들이 흥미롭게 다루고 있는 가설개념이다. 일단 베이트슨이 논의하는 플레로마와 클레아투라는 다음과 같다. "겉으로 보기에 크레아투라와 플레로마 사이의 양분에 이원론이 있다 하여도, 이 양자는 설명을 위한 양분 이외에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분리되거나 분리할 수 없다. 한편으로는, 모든 크레아투라는 플레로마 안에서, 그리고 플레로마를 통해서 존재한다. 크레아투라라는 개념의 사용은 그 자신이 물질적인 것이 아닌 어떤 유기적이고 소통적인 특성이 있음을 예시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클레로마는 플레로마에 대한 인식을 소유한다. 우리는 이 양자를 단지 결합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고 어떠한 경우로든 분리되지 않는다. 물리학과 화학의 법칙들은 크레아투라에 있어서 무관하지는 않고 유효하지만, 그러나 크레아투라를 위한 설명에 충실한 것들은 아니다. 그러므로 크레아투라와 플레로마는 데카르트의 정신과 물질과 같은 분리된 실체가 아니다."1) 본문이 난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간단히 말하면 플레로마는 소위 나의 세계를 가능하게 하지만 나의 세계에 드러나지 않는 환경과도 같은 것이다. 나의 천년전의 별에 대한 지금의 인식에는 천년전부터 지금까지 별을 달려오게 한 그 활동성 자체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체계를 가능하게 하는 환경인데 그 환경은 어떠한 의미로든 체계를 통하여 파악되지 않는다.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내가 나의 여자친구를 위해 그림 한 장을 그렸다. 그 그림을 친구에게 선물했다. 친구는 그 그림에 있는 빨파노의 색과 여러 구도를 본다. 그러나 내가 그 여자를 위해 그림을 그리고자 했던 마음의 따뜻한 사랑과 동기, 그 그림을 그리기 위해 움직인 손과 눈의 운동은 전혀 그 그림에 나타나지 않는다. 마음의 플레로마는 그림이라는 클레아투라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플레로마 없이는 클레아투라가 존재할 수 없다. 창발성의 존재론에서 중요하게 언급했던 체계와 환경이라는 터미놀로지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클레아투라와 플레로마라는 터미놀로지와 개념적으로 유사하다. 우리의 환경은 우리의 시스템에 기여하지만, 우리의 시스템으로 그 환경의 핵심을 파악하거나 그곳으로 진입할 수는 없다. 사실 이러한 환경과 시스템에 대한 논의는 전통적인 도식인 '감추어진 자연'과 '드러난 자연'이라는 관념에서도 어떠한 원천적인 암시를 담고 있다. 철저하게 시스템을 하나의 기계적인 도식으로 이해한다면 시스템을 통해서 파악된 모든 것만이 유일한 것이고 환경은 그 파악된 내용에 속하게 된다. 여기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새로움도 없으며 창발성도 존재할 구석이 없다. 그러나 창발성의 존재론의 입장에서는 환경이 체계보다 더 근원적이며 복잡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복잡성을 체계가 자신의 방식으로 추상화 할 때 그것을 일종의 창발적 사태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자연철학적 사유와 접맥시켜보자. 우리의 자연은 끊임없이 새로운 생명이 출현한다. 그 생명 가운데에는 우리 인간생명도 마찬가지이다. 백여년전에 할머니가 출현했으며 지금은 더 이상 우리 가운데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할머니가 출현한 자연적 환경을 그저 시스템 내부에서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면, 할머니의 출현과 소멸은 시스템 내부의 요소들의 이합집산으로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창발성의 존재론의 관점에서는 할머니의 출현은 시스템을 둘러싼 환경에 의거한 것이며, 할머니의 탄생과 죽음은 결코 시스템 내부에 의해서 환원될 수 없는 환경의 요소가 된다. 즉 환경은 생명을 새롭게 잉태시키며, 생명의 소멸은 그 환경에 다시 겹겹히 쌓이면서 특정한 방식으로 또 다른 생명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는 무궁무진한 정보의 풀이 되는 것이다. 할머니의 소멸은 우리 시스템 내부로 환원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전통적인 유물론적 시스템이론의 관점이라고 한다면, 창발성의 존재론은 그러한 관점을 거부한다. 할머니의 소멸은 시스템 내부에서 제한적으로 파악한 사건일 뿐이며 할머니는 시스템 내부에서 파악할 수 없는 방식으로 환경에 다시 소여된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환경은 체계가 온전히 환원할 수 없는 방식으로 새롭게 체계 안으로 사건들을 드러낸다. 그러한 환경의 무한성과 체계의 유한성 사이의 컨트라스트는 바로 플레로마와 클레아투라라는 터미놀로지가 말하려는 강조점이기도 하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Obwohl in dieser Dichotomie zwischen Creatur und Pleroma scheinbar ein Dualismus besteht, ist es wichtig, sich darüber im klaren zu sein, dass beide außer als Beschreibungsebenen in keiner Weise getrennt oder trennbar sind. Einerseits existiert alle Creatur im und durch das Pleroma; oder Gebrauch des Begriffes Creatur unterstellt das Vorhandensein gewisser organisatorischer und kommunikatorischer Eigenschaften, die selbst nicht materiell sind. Andererseits besitzt nur die Creatur Erkenntnis des Pleroma. Wir können die beiden nur in Verbindung antreffen niemals getrennt. Die Gesetz der Physik und Chemie sind für die Creatur keinesweges irrelevant – sie gelten nach wie vor – aber sie reichen zur Erklärung nicht aus. Somit sind Creatur und Pleroma keine getrennten Substanzen wie Descartes’ »Geist« und »Materie«. Gregory Bateson & Mary Catherine Bateson, Wo Engel zögern, STW 1769, 33-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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