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의원은 그후 다시 와서 홍랑의 갸륵한 효심과 사람됨을 보고 자기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집에서 수양딸처럼 그녀을 키웠다. 시문을 배워 주고, 여자가 해야 할 예의 범절 등 육예(六藝)를 가르쳤다. 홍랑은 행복스럽게 자랐다. 그러나 그 마음 속에 서린 고독, 부모를 그리는 정한(情恨), 그것은 그녀의 예쁜 얼굴에 그림자를 지게 했다.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깊은 한숨이 버릇이 되었다. 그녀는 집생각을 하였다. 집이래야 혈육도 한 사람 없는 집, 집 생각은 곧 어머니의 생각이었다. 처마끝에 날아드는 제비를 보고, 저녁이면 울타리의 둥지를 찾는 새들을 보며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앞강이 간밤 비에 모래밭 되었구나. 먼 바다 만리 길에 고향 가는 저 배야. 날새라면 새봄에 고향 찾아가련만 이 몸은 타관 만리 의지없이 예 남았구나.]
{전강야우창허사(前江夜雨漲虛沙) 만리동정일범사(萬里同情一帆斜) 요상고원춘기도(遙想故園春己到) 공회무뢰좌천애(空懷無賴坐天涯)}
부용의 '사고향(思故鄕)'을 뇌어 본다. 수양 부모의 극진한 애정도 그녀의 뼈아픈 고독을 달래 줄 수는 없었다. 그녀는 기어이 양부모의 집을 나섰다. 굳이 잡는 최의원의 주름진 얼굴에 눈물이 흘렀다. 떠나는 홍랑도 통곡하며 울었다. 이별의 슬픔때문만이 아니었다. 참았던 슬픔이 그녀를 호곡하게 했다. 혈혈단신인 자신의 처지가 그녀를 더욱 섧게 했다. 보내는 가족, 떠나는 홍랑, 모두가 보내기 싫고 떠나기 싫은 사이였다. 그러나 그녀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우선은 어머니의 무덤이라도 자주 볼 수 있는 곳으로 가겠다는 것이 그녀의 가장 큰 떠남의 이유였다. 그 효성, 그 정성을 아는 최의원은 더 이상 홍랑을 잡지 않았다. 다만 무사하기만을 마음으로 기원했다. 한편으로 그 총명, 그 인간됨이 어려운 세상을 능히 살아갈 것이라고 희망을 걸어 보기도 했다. 집에 돌아온 홍랑은 어머니의 무덤을 돌아보았다. 무덤의 잡초를 하나하나 뽑아 내었다. 그후 홍랑은 기적에 몸을 얹었다. 천애의 고아! 그녀가 갈 길은 이 길이 더 행복한 길일는지 모른다. 홍랑은 고심했다. 언제든지 마음이 가라앉거든 돌아오라시던 최의원의 집을 생각했다. 그러나 얼른 발걸음이 내키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혼처를 주선하는 어른들의 권유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결심이 서지 않았다. 자신은 남을 불해하게만 만들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얼굴도 모르는 채 돌아가신 아버지, 간호도 제대로 못해 드리고 보낸 어머니. 그녀는 자신의 운명이 평탄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녀는 결심했다. 혼자의 몸으로 세상을 살아 가기에는 차라리 기적에 몸을 올리는 것이 제일 나을 것 같았다. 기녀(妓女) 홍랑(紅娘)! 그녀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녀를 아까워했다. 기적에 든 홍랑은 일약 유명해 갔다. 그도 그럴 것이, 천부의 미모에 뛰어난 시재(詩才), 취의원 집에서 배운 양갓집 규수로서의 예의범절,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홍랑이었다. 뭇 한량들의 희망의 적(的)이 되었다. 짓궂은 한량, 부잣집 자제, 권력있는 세도가들이 다투어 돈꾸러미를 나귀에 싣고 홍랑의 집을 찾았다. 문지방이 달았다. 그러나 홍랑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뛰어난 기지로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곤 하였다. 그럴수록 한량들은 등이 달았다.
[술 취한 나그네여 치맛자락 잡지 마오. 비단 치맛자락이 손끝에 찢어지리다. 치맛자락 찢어진들 아깝지야 않지만 당신과의 은정(恩情)이 끊어질까 두렵다오.]
{취객만라삼(醉客挽羅杉) 나삼수수열(羅衫隨手裂) 불석일라삼(不惜一羅杉) 단공은정절(但恐恩情絶)}
이렇게 그들의 끈질긴 유혹을 이겨 내고 있던 홍랑이었다. 이때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이 북해평사(北海平使)로 경성에 왔다. 최경창은 자(字)는 가운(嘉運), 호(號)는 고죽(孤竹)으로 해주가 본관이다. 중종 24년(1539)에 나서 선조 16년(1583)까지 산 사람으로 최충의 후손이며 수인(守仁)의 아들로 박순의 문인이다. 문장과 학문이 능해 이율곡. 송익필 등과 함께 팔문장(八文章)으로 꼽혔으며, 특히 당시에 뛰어나 백광훈, 이달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꼽혔다. 선조 1년(1568)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대동도찰방을 거쳐 1583년 정언이 되고, 뒤에 종성부사를 지냈다. 시와 글씨에 능했으며, 특히 피리를 잘 불었다. 어려서 영암의 해변세 살 때에 왜구를 만났으나, 퉁소를 구슬피 불자 왜구들이 향수에 젖어 흩어져 갔으므로 위기를 면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583년 방어사의 종사관에 임명되어 상경 도중에 죽었다. 숙종때 청백리에 녹천되었다. 문집으로 '고죽유고(孤竹遺稿)'가 전한다. 하루는 고죽이 취우정에 나갔다. 여러 사람이 술자리에 어울렸다. 홍랑, 선옥, 혜원 등 기생들이 술시중을 들고 있었다. 취흥이 도도해져 갔다. 때마침 열 나흘 둥근 달이 정자 위에 둥실 떴다. 많은 사람들의 훤요가 밤하늘에 퍼졌다. "아 늬들은 꿀먹은 벙어리들이냐? 이놈들아, 흥을 돋워야지 자리만 지키고 앉아만 있으면 되느냐?" 이부사가 호통을 쳤다. "아이구, 부사님 너무하신 말씀 마셔요." "아아니 너무 하다니. 그래 내 말이 어디 잘못된 데라두 있느냐?" "그러믄요. 언제 저희들에게 노래부를 기회를 주셨어요?" "거 봐요, 역시 최평사님이 제일야.... 호호호..." "하하하하..." "저놈이 최평사에게 관심이 있는 모양이구려. 그럼 어디 기회를 줄테니..." "최평사님, 무얼 부를까요? 이백의 [장진주(將進酒)], 아니면 난설헌의 [강남곡(江南曲)]?" 혜원이 물끄러미 쳐다보며 묻는다. "아따 이놈아, 유식한 체 말고 네 맘대로 부르거라. 그것까지 이래라 저래라 하겠느냐?"
[유리병 호박잔이 짙고 작은 통에 떨어지는 술은 구슬처럼 붉구나. 용을 삶고 봉을 구우니 구슬 같은 기름이 끓는데, 비단 휘장은 향기로운 바람을 에웠구나. 용적을 불고 타고를 치는 흥겨운 소리에 호치로 부르는 노래 가는 허리 아름다운 춤이구나. 하물며 이 푸른 봄에 하루 해가 늦어 가니 복사꽃은 붉은 봄비처럼 어지러이 지는구나. 그대에게 권하노니 온종일 마음껏 취해 보세. 술잔은 유령의 무덤 위에 다시는 못 간다오.]
이하(李賀)의 [장진주시(將進酒詩)]가 혜원의 맑은 목소리에 울려 퍼진다. 좌중은 침묵, 달만 더욱 밝았다. 노래가 끝나자 박수소리가 요란하고, 다시 술잔이 올려진다. "여보 최평사, 노랠 들었으면 화창을 해야지요." "아 아니오, 혜원의 노래는 이부사가 받아야 하는 게요." "옳지, 홍랑아 네가 대신 받아라. 아 어서."
[하소연할 길 바이 없어 말 못하는 이 마음 이것이 진정 꿈일까 아니면 어리석음일까. 대답 없는 <강남곡(江南曲)>을 비파에 실어 보나 내 심정 묻는 이는 한 사람도 없구려.]
{함정환불어(含情還不語) 여몽복여치(如夢復如痴) 녹기강남곡(綠綺江南曲) 무인문소사(無人問所思)}
홍랑의 낭랑한 음성이 비파 소리에 더욱 청아하다. 노래가 끝나자 최경창은 무릎을 치며 탄식한다. "너의 그 심사를 이제껏 눈치채지 못한 이 어리석음이 자못 크구나." 술잔을 가득 부어 홍랑에게 권하며 칭찬한다. "아니, 최평사가 아까 혜원의 노래에 화창하지 않은 것은 다 속이 있어서 그랬구려." "거 보세요. 전 벌써 눈치채고 있었어요." 혜원이 종알대며 입을 삐쭉한다. "그래, 우리 둘이나 재미보자꾸나. 최평사는 홍랑에게 맡기고 어서 이리 오너라." 이부사가 혜원을 끌어 안자 좌중이 박장대소한다. 그날 밤 주연이 파한 후에 고죽(孤竹)은 홍랑을 불렀다. "홍랑아, 내 네 집안 일을 다 들어 알고 있었다." "녜? 평사님께서 어떻게..." "내, 네 어머님의 일과 너의 극진한 효성, 그리고 최의원의 일까지 잘 알고 있느니라." "....." "그 극진한 효성이 가상하구나." "......" 말을 못하고 앉아 있는 홍랑의 얼굴에 두 줄기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른다. 촛불이 지짓 심지를 태운다. 한동안 둘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홍랑아, 눈물을 거두렴. 네 눈물을 보니 나도 마음이 아프구나." "송구스럽사옵니다. 미천한 것을...." "아니다. <부혜생아(父兮生我) 모혜국아(母兮鞠我) 욕보기덕(欲報其德) 호천강극(昊天岡極)>이라지 않았느냐? 너의 마음을 내가 충분히 이해한다." 고죽(孤竹)은 손을 들어 홍랑의 등을 어루만지며 위로한다. 홍랑은 고마웠다. 일개 천기(賤妓)인 자기를 그렇게 생각해 주는 고죽이 고마웠다. 이 어른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의지하고, 거기서 아버지의 체취를 느끼고 싶었다. 홍랑은 고죽의 가슴에 쓰러졌다. 흐느낌이 어깨를 추이게 했다. 고죽은 말없이 홍랑을 감싸 안았다. 이 날부터 홍랑은 모든 일을 청산하고 오직 고죽을 모시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고죽에게서 한 남자의, 아니 부모의 정을 되찾았다. 어두운 얼굴이, 메꿀 수 없는 마음의 공허가 고죽으로 하여 차츰 메꿔져 가는 자신을 발견하는 홍랑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짧은 기간. 이듬해 봄에 고죽이 내직으로 서울로 올라가게 된 것이다. 고죽이 떠나는 날, 홍랑이 따라 나와 쌍성(지금의 영흥)까지 오며 이별을 아쉬워했다. 함관령에 이르러 날이 저물고, 마침 봄비가 소리없이 내렸다. 홍랑이 길가에 있는 버들가지를 꺾어서 고죽에게 주며 이렇게 서러워했다.
[묏버들 가지를 가리어 꺾어서 임에게 드립니다. 주무시는 창밖에 이 버들을 심어 두고 보시옵소서. 밤비로 그 가지에 새잎이 돋거든 저를 기억해 주시옵소서.]
{묏버들 가려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대 자시는 창 밧긔 심거 두고 보쇼셔. 밤비에 새닙 곳 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쇼셔.}
순연한 우리말로 쓴 시조다. 정든 임을 보내면서 부른 시가가 수없이 많으나, 이렇듯 청아하고 담담하게 흐르면서도 뜨거운 정을 느끼게 하는 멋있는 노래는 쉽게 찾기 어렵다. 산버들 한 가지를 골라 꺾어서 가는 임에게 주면서 '밤비에 새잎이 돋거든 나를 보듯이 보아 주시옵소서'라고 한 이 여인의 마음씨에서 우리는 속되지 않고 차원높은 애정의 본심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안개 같은 봄비에 드리운 버들가지를 해마다 가지 꺾어 가는 님께 드리오. 봄바람은 이별의 슬픔을 모르노라고 낮은 가지 휘둘며 길가의 티끌만 쓰오.]
{양류함연패안춘(楊柳含煙覇岸春) 연년격절증행인(年年擊折贈行人) 동범불해상이별(東凡不解傷離別) 취각저지소로진(吹却低枝掃路塵)}
이것은 대여류시인(大女流詩人) 허난설헌의 [楊柳枝詞]란 시지만, 홍랑의 정념에 미치지 못한다. 은근한 정서, 면면한 정한은 한이 없다.
[고운 뺨에 눈물지며 봉성(鳳城)을 나올 적에 새벽에 우짖는 꾀꼬리소리 더욱 서러워. 말 위에 비단 적삼을 강 건너에 두고서 풀잎은 아득한데 나 홀로 떠나야만 하나요.]
{옥협척제출봉성(玉頰隻啼出鳳城) 효앵천전위이정(曉鶯千澱爲離情) 나삼보마하관외(羅衫寶馬河關外) 초색초초송독행(草色超超送獨行)}
[맥맥히 서로 보며 건넨 그윽한 난초 이제 한 번 멀리 가면 언제 오려나 함관에선 옛노래랑은 부르지를 마오. 지금까지 운우(雲雨)가 청산에 어둑하구려.]
{상간영영증유란(相看泳泳贈幽蘭) 차거천애기일환(此去天涯幾日還) 막창함관구시곡(莫唱咸關舊時曲) 지금운우암청산(至今雲雨暗靑山)}
홍랑의 [증별(贈別)]을 고죽은 이렇게 받았다. 구구절절(句句節節)이 이별의 슬픔은 홍랑에 못지 않는다. 이렇게 헤어진 홍랑과 고죽이었다. 애타는 기다림 속에서 3년이 흘렀다. 행여나 오시려나, 행여나 소식이 있을까? 두문불출 기다리는 마음도 잊었는가! 소식이 막힌 채 3년! 그해 을해에 고죽이 병상에 누워 봄부터 겨울까지 병석을 떠나지 못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홍랑은, 즉일로 길을 떠나 꼬박 주야를 걸어서 서울의 고죽을 찾았다. 때에 양계(兩界, 함경도. 평안도)의 금함이 있었고, 또 국휼(國恤. 명종비 인순왕후의 승가)이 있어 비록 연제(練祭)는 지냈으나, 평일과 같지 않은 때여서, 이것이 말썽이 되어 드디어 고죽이 면관(免官)이 되는 사태로까지 번졌다. 홍랑은 울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고죽은 보낼 수 없는 홍랑을 보내야 했다. 그는 말없이 한 수 시를 써서 홍랑에게 주었다.
[덜컹덜컹 쌍수레의 바퀴들은 하루에도 천만 번씩 구른다지요. 마음은 한가진데 수레는 같이 못 타 이별한 후 세월은 많이도 변했구려. 수레바퀸 그래도 자취를 남기지만 그리워 그리워도 볼 수 없는 그대여]
{린린척차륜(燐燐隻車輪) 일일천만전(一日千萬轉) 동심부동차(同心不同車) 별리시루변(別離時屢變) 차륜상유적(車輪尙有跡) 상사인불견(相思人不見)}
고죽이 써 준 이별의 아픔을 받은 홍랑은 발걸음마다 눈물이, 발걸음마다 고죽에 대한 애정이 고여 갔다. 그리워하면서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는 것이 사람의 일이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아야 하는 것이 사람의 일이기도 하다. 홍랑과 고죽은 두 번 만났다. 그러나 두 번째는 만나지 않았던 것이 차라리 덜 마음 아팠을 것이다. 고죽은 홍랑의 시조를 [번방곡(飜方曲)]이라 하여
[절양류기여천리인(折楊柳寄與千里人) 위아시문정전종(爲我試問庭前種) 일야신생엽(一夜新生葉) 초췌수미시첩신(憔悴愁眉是妾身)]
이렇게 한역하여 화전지에 옮겨 가전(家傳)하게 하였다 하니, 두 사람의 애끓는 이별과 그 풍류스런 멋이 새삼 부러울 뿐이다. 최경창은 뛰어난 시인이었다. 삼당시인의 한 사람인 손곡(蓀谷) 이 달과 자별한 사이였다.한 번은 이달이 고죽의 임소(任所)를 지나다가 정을 주었던 기생이 상인이 파는 자운금(紫雲錦)을 보고 사 달라고 요구하였다. 때마침 이달은 가진 돈이 없었으므로 최경창에게 [증 최경창(贈 崔慶昌)]이란 시를 써서 보냈다.
[호남의 장사꾼이 강남시에서 비단을 파는데 아침 햇살이 비치어 자줏빛 연기가 나는구려. 정을 주었던 여인이 치맛감을 보채는데 화장그릇 뒤져 보나 내 줄 돈이 한푼도 없구려.]
{호상매금강남시(湖商賣錦江南市) 조일조지생자연(朝日照之生紫煙) 주인정욕작군대(住人正欲作裙帶) 수탐장 ? 무직전(手探粧 ? 無直錢)}
고죽이 이 시를 보고 즉시 회답하기를, "가치로 말하면 어찌 금액으로 헤아리겠소? 우리 읍이 본시 작으니 넉넉히는 보답 못하오." 하고 쌀 한 섬을 보내니, 이달이 그 기생에게 자운금 한 필을 사서 주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