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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주고 받은 차원 높은 애정(愛情) 본문
시(詩)로 주고 받은 차원 높은 애정(愛情)
- 송강(松江) 정철(鄭澈)과 진옥(眞玉)과의 절창(絶唱) 정철(鄭澈)은 호(號)를 송강(松江), 자(字)는 계함(季涵) 또는 칩암거사(蟄菴居士)라 하며 연일이 관향인데, 철(澈)은 그의 명(名)이다. 중종 31년(1536)에 나서 선조 26년(1593)에 죽은 근조(近朝) 가사문학의 대가다.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과 [정유항전(鄭惟沆傳)]에 나타난 그의 가계(家系)을 보면, 송강의 고조 연(淵)은 병조판서, 증조 백숙(白淑)은 김제군수, 조부 위(僞)는 사원참봉이엇다. 부(父) 유항은 돈녕부판관을 지냈는데, 대사헌 안팽수의 따님과 결혼 4남 2녀 중의 네째로 태어났다. 누님은 인종의 귀인이 되고, 둘째 누님은 계림군의 부인이 되는 등 훌륭한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평탄하지 못했다. 매부인 계림군 유(溜)가 정명순, 허자 등의 모함으로 을사사화에 관련하여 죽고, 백형 자(滋)는 잡혀 장류되어 도중에서 죽었으며, 부친은 관북,정평.연일 등에 유배되었으니 이때가 송강의 나이 10살이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어렸을 때 큰 누님을 보러 동궁에 자주 드나들면서 당시 대군으로 있던 명종과 함께 놀기도 하며 자랐다. 명종 6년에 그의 부친이 유배지에서 풀려 전라도 창평의 당지산(唐旨山)에 우거하였는데, 이 시기에 그는 송강반의 기암누정, 성산녹반의 대나무 숲, 명봉산 위의 학떼 등을 벗삼아 소년 시절의 동경과 꿈을 키웠다. 이때 삼당(三唐)의 한 사람인 임석천(林石川)에게 시를 배웠고, 하서 김인후, 면앙정 숭순에게 수학하였으니, 이것이 그의 문학에 큰 길잡이가 되었다. 그가 관계에 나온 것은 명종 16년, 16세에 진사시에 1등을 하고, 다음해 3월에 문과별과에 장원하면서부터이다. 명종이 방목(傍目)을 보고 어릴 때 놀던 죽마의 정을 생각하시어 불러서 특별히 대우하고 사헌부 지평을 제수하였다 한다. 그러나 그의 청렴 결백성과 강직성이 법을 고집하고 명종의 뜻을 거스리는 일이 있어서, 관로에는 크게 나가지 못한 채, 외청 한직으로만 돌았다. 32세때는 율곡 이이와 같이 호당에 피선되기도 하였으나 정작 그의 파란의 정치적 역정이 시작된 것은 그가 33세 되던 때부터다.
그의 일생을 크게 분계를 지어 보면 관로의 생활, 은거의 생활, 적소의 생활 등으로 나눌 수 있겠다. 관로의 생활은 그가 동,서 분당의 와중에서 서인의 편에 섰다가 홍가신, 이발과의 불화로 진산군수 이수의 행로사건에 논계를 올렸다가 탄핵을 입어 외청으로 고향에 돌아가게 되었다. 45세때 외관이 되어 강원도 관찰사로 제수되자 저 유명한 [관동별곡]과 [민훈가(民訓歌)] 16수를 지었다. 전라.함경 관찰사, 예조판서, 판돈령부판관 등을 역임하면서 계속 동인과의 불화 속에서 지내다가, 이이의 조정 노력도 헛되이 을유 선조 18년 4월 스스로 퇴직하기에 이르니 그때의 나이 50세였다. 그의 은거의 생활은 이때부터 을축년에 이르는 약 4년간의 기간이었는데, 그가 고양(高陽) 신원(新院)과 전라 창평에 은거하면서 세상을 비관하면서 지낸 기간이다. 새원 원주[院主(경기도 고양에 있는 역원에서 자고 지키는 관원)]가 되어 사립문을 걸어 닫고, 흐르는 물, 푸른 산을 벗삼아 지내노라. 아희야 벽제(碧蹄)의 손님(시류의 손님)이 찾아와서 찾거든 내가 나가고 없다고 하거라. (새원 원주 되어 시비를 고텨 닷고 유수 청산을 벗삼아 더뎟노라. 아해야 벽제의 손이라커든 날 나가다 하고려) 쓴 푸성귀 나물과 따끈하게 덥힌 물이 고기보다 훨씬 맛이 있구나. 초가집 좁은 것이 더욱 내 분수에 알맞는구나. 부족한 것은 없어도 다만 임금님을 그리워하는 탓으로 시름겨워 하노라. (쓴 나물 데온 믈이 고기도곤 마시 이셰. 초옥 조븐 줄이 긔 더욱 내 분이라. 다만당 님 그린 타사로 시름 계워하노라.) 세상의 공명을 버리고 청산 유수를 벗삼아 지내고자 하는 심정이 그대로 잘 드러나 있고, 시류를 배척하는 심정이 말 밖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 가난한 생활, 그 자체는 불평이 없으나 연군의 정은 참을 수 없다는 것이 송강의 심정이다. 이 기간은 정치적으로는 실의의 시기라 할 수 있겠으나, 작가 송강으로서는 가장 작품 활동이 왕성했던 시기였다. 자연 속에 유유자적하면서 시작에 탐익하던 시기다. 창평에서는 외숙 김성원의 산정을 얻어 수석과 갈매기와 학을 벗하여 독서를 하면서 항상 국가를 걱정하는 정이 이때 지은 [성산별곡]. [사미인곡].[속미인곡]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배꽃은 벌써 지고 두견새 슬피 울 때에, 낙산의 동쪽 둔덕에 있는 의상대에 올라 앉아, 해뜨는 모습을 보려고 밤중에 일어나니, 상서로운 구름이 피어오르는 듯, 여섯 마리의 용이 서로 버티는 듯, 바다에서 떠오를 때는 온 천지가 흔들흔들하는 듯하더니, 하늘 한복판에 솟구쳐 뜨니 머리카락을 헤아릴 만큼 밝구나. 아마도 내가 임금님 곁에 없는 동안에 간신배들이 임금님의 총명을 어둡게 할까 걱정이 되 는구나.] {니화는 발셔 디고 졉동새 슬피 울 제, 낙산 동반으로 의상대에ㅐ 올나 안자 일출을 보리라 밤듕만 니러하니, 샹운이 지픠는 둥 뉵용이 바틔는 둥, 바다히 떠날 제는 만국이 일위더니, 텬즁에 티뜨니 호발을 혜리로다. 아마도 녈구름이 근쳐의 머믈셰라.(관동별고)} [동푸이 건듯 불어 쌓인 눈을 녹여 내니, 창 밖에 심은 매화가 벌써 두세 송이가 피었구나. 가뜩이나 날씨는 차가운데 그윽한 향기는 무슨 일인가. 황혼이 되고 달이 떠서 베갯머리에 비치니, 느끼는 듯 반기는 듯 임이신가 아니신가. 저 매화 한가지를 꺾어서 임(선조)이 계신 곳에 보내고 싶구나. 임께서 너를 보시고 어떻게 생각하시겠는가.] [동풍이 건듯 불어 쌓인 눈을 녹여 내니, 창 밖에 심은 매화가 벌써 두세 송이가 피었구나. 가뜩이나 날씨는 차가운데 그윽한 향기는 무슨 일인가. 황혼이 되고 달이 떠서 베갯머리에 비치니, 느끼는 듯 반기는 듯 임이신가 아니신가. 저 매화 한 가지를 꺾어서 임(선조)이 계신 곳에 보내고 싶구나. 임께서 너를 보시고 어떻게 생각하시겠는가.] {동풍이 건듯 부러 Ъ횬?헤쳐 내니, 창 밧긔 심근 매화 두세 가지 퓌예셰라. 갓득 냉담한대 암향은 므사 일고. 황혼의 달이조차 벼마태 비최니, 늣기는 듯 반기는 듯 님이신가 아니신가. 져 매화 것거내 여 님 겨신대 보내오져.님이 너를 보고 어떠타 너기 실고} (사미인고) [그것은 생각도 마시요. 마음에 사무친 일이 있습니다. 임(선조)을 뫼시고 있어 봐서 임의 일을 내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른 봄의 추위와 여름의 무더위는 어떻게 지내시며, 아침 전에 드시는 죽과 아침 저녁 수라는 예와 같이 잡수시는지. 기나 긴 밤에 잠은 어찌 주무시는가.] {글란 생각 마오. 매친 일이 이셔이다. 임을 뫼셔 이셔 임의 일을 내 알거니, 춘한 고열은 어찌하여 지내시며, 죽조반 조석뫼 예와 같이 셰시는가. 기나긴 밤의 잠은 어찌 자시는고.} (속미인곡) 송강은 어디 가나 임금님에 대한 연군의 정을 금할 수 없었다. 의상대에서 해 뜨는 모습을 보면서, 봄이 되어 추위를 이기고 핀 매화를 보면서도, 조석으로 밥상을 받으면서도 임금님을 생각하는 정이 솟구쳤다. [鄭松江이 강계에 귀양 가서 이 가사를 지었다.], [가사 前後美人曲은 시골(창평)에 있을 때 지은 것으로, 연월을 기록하지 않았으니 아마 丁亥 戊子年間인 듯하다.] 등의 기록으로 보아 이 시기가 그의 작품 생활의 절정의 시기였다. 이들 작품들에 대해서 서포 김만중은 동방의 [離騷(이소)]라 하여 극찬하기도 하였고, 이수광, 홍만종, 김춘택 등은 다음과 같이 격찬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참다운 문장은 단지 이 세 편 뿐이다.] (서포만필) [우리나라 노래로는 정철의 작품이 가장 우수하여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이 후세에 성행하였다.] (지봉유설) [그 마음은 충성되고 그 뜻은 맑고 그 절개는 곧으며, 그 문장은 우아하며 완곡하고, 그 가락은 비애로 우나 바르기 때문에 거의 굴원의 이소에 짝할 만하다.] (북헌집) 그의 적소(謫所)의 생활은 선조 22년 무렵부터 시작된다. 을축 송강이 54세때에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있음에도 대내(大內)에 들어가니 선조가 그의 충절을 가상하여 우의정에 특배하고, 동 23년 좌의정에 제수하니 다시 관계에 나서는가 하였다. 그러나 선조의 비가 아들이 없고 측실에 아들이 있었는데, 왕이 생각하는 인빈 김씨의 소생인 신성군을 반대하고 공빈 김씨 소생인 광해군을 세우려 한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산해의 배후 책동에 몰려, 결국은 파직되고 명천에 유배되었다. 다시 진천. 강계로 옮겨 유배되었으니 이것이 그의 유배생활의 시작이다. 이런 속에서 임진란이 일어나자 선조가 몽진하여 개성에 이르니, 백성들이 모두 몰려 나와서 정철을 기용하기를 선조께 간청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왜구가 쳐들어오매 상(上)이 서쪽으로 몽진하여 개성에 이르니, 백성들이 길을 막고 정철을 부르기를 빌었다.] {당의통략(黨議通略)} 이 기록을 보아도 백성들의 송강에 대한 기대는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드디어 그해 5월에 석방되어 다시 관계에 나와 선조 26년(1593)에 봉사하여 명에 갔다가 오는 등 분골쇄신 나라를 위하여 충성하다가, 그해 12월 8일 강화 우거(寓居)에서 파란의 생애를 마치니 향년 58세였다. 숙종때 문청(文淸)이라 익(謚)하였으며, [송강집] 11권 7책과 [송강가사] 2권 1책이 있고, 작품으로는 가사가 4편, 시조가 84수 전한다. 그의 인물됨을 말한 기록을 보자. 1.간신 정철은 이리 같은 바탕으로서 독한 마음을 품고, 겉으로는 유우머러스한 체하면서 속으로는 남을 시기하는 지라, 청백한 의논이 그를 용납해 주지 않았다.(丙申十二月, 羅明德硫中) 2.정철은 성질이 괴팍하고 말이 망녕되며, 가볍고 경박하여 조롱을 즐기고 희학(戱謔)을 좋아하여 허물을 자초했다.(선조실록) 3.정철을 보면 겉으로는 청백하다는 명성에 기댔으나, 송강의 성행은 실제 마음이 음란한 것을 탐하며 기롱과 방탕으로 한 평생을 그르쳤다. (癸卯. 安重默 琉) 4.그의 마음은 바르고 그 행실은 방정하며 그 언동은 곧다. (선조) 5.사계(沙溪)선생이 일찍이 정송강을 어떤 사람으로 알고 있느냐고 묻기에, 소자의 부형이 일찍이 말하 기를 청강하고 狹隘(협애)한 사람이라고 합디다 하니, 선생께서는 옳다 하시며, 이것은 공이 스스로 청백하고 티가 없음을 믿고, 안하무인격(眼下無人格)으로 놀았기 때문에 마침내 일세에 구질(仇嫉)을 받게 되었다고 하셨다. (尤庵集) 6.충효 청백함이 행동에 나타나고, 의를 좋아하며 이를 멀리하고 절조가 굳다. (신흠, 송강집서) 7.최명길이 이항복에게 정송강이 어떤 사람인가고 물으니, 항복이 대답하기를 반취했을 때는 손뼉을 치며 담론한느 것을 보면 마치 하늘 위의 사람을 보는 것 같으니, 시속배들이 어찌 흉내를 내겠느냐 했다. 명길이 후에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아직 송강을 보지는 못했으나, 백사의 고안(高眼)으로 이같이 흠복하니 가히 그의 언론풍채를 짐작할 수 있겠다. [지천유사(遲川遺事)] 위의 기록을 보면 1-3은 송강의 반대파인 적정들의 혹평이므로 논란할 것들이 못되고, 4-7은 송강을 잘 아는 사람들의 인물평이니 송강의 사람됨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7의 이항복의 평은 그의 문학인으로서의 풍모를 잘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본래 성격이 강직청렴은 하였으나 협애한 점이 있었던 듯하다. 그의 성격은 정치가로보다는 예술가로서의 기상이 더한 듯하다. [선조실록]에 보면 '송강은 강화에 우거하다가 술병으로 죽었다.'고 하였고, 송강 자신도 [주중사객(舟中謝客)]에서 '반백 인간이 술에 취하고, 이름을 얻었다.'라고 하였고, 또 그의 시조에 [재 너머 성권롱 집의 술 닉닷 말 어제 듯고 누은 쇼 발로 박차 언치 노하 지즐 타고 아해야 네 권롱 겨시냐 정좌수 왓다 하여라] 한 것을 보면 이런 호일방분(豪逸放奔)한 성격이 그의 풍류시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는 것이며, 이점은 그의 많은 작품 중에 잘 나타나 있다. 정인보님은 [정송강과 국문학]에서 송강과 고산(孤山)의 작품을 이렇게 말한다. [고산은 대체 담아의 일경으로 나아가 저 강호연파(江湖煙波)와 배합되는 데 좋으나, 송강은 호굉(豪宏)할 때는 호탕하고 처절할 때는 처절하고, 더욱 그 순박하게 나오는 사기야말로 곧 薄俗(박속)을 돌려 놓듯 한 데가 있다. 또 묘사하는 솜씨가 서로 다르니, 고산의 [어부사시사]에 '우는 거이 벅구기가 프른 거시 버들 숩가' 같은 것은 물외한인(物外閑人)의 우유(優游)하는 심경을 흔적없이 나타냈고,'하마 밤들거냐 자규 소리 맑게 난다'와 같은 것은 호남 산수간의 밤경(夜景)을 귀신같이 그렸다. 그러나 송강이 [관동별곡] 끝에 '나도 잠을 깨어 바다를 구버보니 기피를 모라거니 가인들 엇디 알리. 명월이 천산만락의 아니 비친대 업다.'라 한 것을 보면 명월 이하는 잠 깨어 보는 새벽의 형용이 눈에 선한 데다가 조자(調子)를 졸지에 변하여 짝 맞추는 것이 바뀌어지며 말겻이 나무등걸같이 서니, 정히 밤은 깊고 사방은 고용한 그림으로 미치지 못할 그림이다. 이뿐 아니라 단가로도 '내 한낫 산깁 적삼 빨고 다시 빨아, 되나 된 벼태 말리고 다랄이 다려, 나난 듯 날린 엇게에 거러 두고 보쇼셔'의 '나난 듯 날린 엇게'라 함이 미인을 그리는 데 얼마나 고절(高絶)한가. 생각하여 보면 벌써 그 솜씨를 알려니와, 그 '엇게'를 눈에 그리되, 이같이 어여삐 보인는 것이 실상 자기의 연모(戀慕)가 하나에 모인 전차니 한인악부(漢人樂府)와 유사하나, 송강은 한 것이 없이 저절로 되어 한층 높다.] 정송강은 이런 호방한 성격의 소유자요, 일대의 정치가요, 일세를 풍미했던 문장가였다. 송강이 35세 되던 해 4월 부친상을 입고 형들과 함께 고양 신원에서 노막을 지키고 있을 때, 그의 어머니가 보낸 편지 하나를 소개해 보자. 삼종지도가 철저했던 이조 사회에서는 어머니가 아들 받들기를 철저히 했다. [나는 걱정없이 여전합니다. 형제분이 여전하기를 바랍니다. 날씨가 하두 험하니 더욱 걱정이 됩니다. 이 심한 더위에 조심하소서. 우리 큰 집도 대도가 무사하나이다. 제수에 쓸 돼지 머리도 두 곳에서 부조로 준다고 사지 말라고 합 니다. 제대로 일이 되었습니다. -신미, 유월 모안(母安)- 대시인 정송강과 기녀 진옥(眞玉)과의 절창이 강화의 우거(寓居)에서 있었다. 진옥은 시조문학에 있어 '송강첩(松江妾)'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는데, 시조 문헌 중에 '누구의 첩'이라고 기록된 것은 진옥 뿐이다. 대개는 '강릉명기', '평안기홍장' 등 기명을 적었는데, 여기 소개하는 진옥도 기녀임에 틀림없는데 '송강첩'이라고 기록된 것은 송강의 지위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조 사회제도 속에서 양반이 축첩하는 것은 조금도 허물될 게 아니었음을 생각하면 이런 기록이 더 많이 있을 수 있겠는데, 유독 시조 문헌에서는 하나만 보일 뿐이다. 시조 작품 중에서도 첩과 정실부인과의 시새움을 노래한 작품이 많다. [첩이 좋다 하되 첩의 나쁜 점을 들어 보시오. 눈요기 하기에 좋은 종을 올려 앉힌 첩은 기강이 문란하고, 노리개로 좋은 기생첩은 여러 가지 일들이 뜻과 같으나, 중문안 지방 관아에 매인 기생을 들여 앉힘이 그 아니 어려우며, 양갓집의 딸을 첩으로 맞아 오면 그 중에 가장 낫지마는, 마루 아래 놓이는 신발짝과 장롱의 귀퉁이가 사대부 집 가풍이 저 절로 잘못되어 간다. 아마도 늙고 병들어도 가정의 가풍과 제반 규모를 지키기는 정실부인인가 하노라] [육청(六靑)] 그러나 송강의 부인 안씨와 진옥의 사이는 그렇지 않았다. 진옥은 본래 무명의 강계의 기녀였다.ㅣ 그녀가 기생으로서 이름을 떨친 것은 송강의 명성과 더불어 빛이 난 것이다. 대정치가의 적거(謫居)요, 일세의 문장가의 유배생활, 거기 필연적으로 우울과 낭만, 실의와 비탄이 뒤따를 것이고, 그 적소의 울분과 실의를 술로 달랬을 것이다. 달이 밝고 오동잎 지는 소리가 스산한 밤, 귀뚜라미의 처량한 울음이 적객의 가슴을 더욱 괴롭혔다. 그때 조용히, 그러나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송강은 누운 채로 대답, 문이 열리며 소리없이 들어서는 여인, 그녀가 진옥이었다. 장옷으로 얼굴을 가린 여인의 방문에 놀란 것은 송강. 더욱 놀란 것은 장옷을 벗고 보인 아름다움- 잘 손질해서 입은 모시 옷의 우아함. 꼭 한 마리의 백학이었다. 침침한 불빛에 비친 얼굴은 담장(淡粧). 그러나 그 소박한 얼굴의 주인은 빙그레 미소를 먹음고 아미를 숙여 깍듯이 예를 드린다. 송강은 말을 잃고 어안이 벙벙하여 앉아만 있다. 너무도 졸지에 당한 방문이었다. 너무나 마음에 부딪히는 충격적인 인상이었다. "죄송하옵니다. 버릇없는 당돌함을 용서해 주옵소서." "아아니,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그리고 어찌된 일이오?" "예, 소첩은 진옥이라 하옵고, 기적에 몸담고 있사옵니다." "그래? 그런데 이 밤중에 어인 일인고?" "예, 벌써부터 대감의 명성을 들었사옵고, 더욱이 대감의 글을 흠모해 오는 천기이옵니다." "그래 내 글을 읽었다니, 무엇을 읽었노?" "제가 가야금을 타 올릴까요?" "......"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을 모르겠고, 하늘 밑에 살면서도 하늘 보기 어렵구나. 내 마음 아는 것은 오직 백발 너뿐인데, 나를 따라 또 한 해 세월을 넘는구나.] {거세부지세(居世不知世) 대천난견천(戴天難見天) 지심유백발(知心惟白髮) 수아우경년(隨我又經年)} 놀랐다. 송강은 정말 놀랐다. 강계에 와서 고통스런 심정을 읊은 자신의 노래를 타고 있지 않은가! 송강은 진옥의 아름다움에 첫 번째로 놀랐고, 자신을 알고 있는 진옥에게 두 번째 놀랐다. 또 그는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는 진옥에게 세 번째로 놀랐다.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그날부터 송강은 적소생활이 조금도 괴롭지 않았다. 마음이 울적할 때면 진옥의 샘솟는 지혜의 이야기를 들었다. 우울할 때면 그녀의 가야금의 선율을 들으면 헝클어졌던 마음이 진무되었다. 그녀는 단순한 기녀가 아니었다. 지혜롭고 슬기로운 여인이었다. 송강은 계속해서 진옥에게 끌려 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적소의 생활 중에서 부인 안씨에게 보내는 서신에서도 송강은 진옥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적어 보내기도 하였다. 부인의 서신 속에도 진옥에 대한 투기나 남편에 대한 불평보다는 남편의 적소 생활을 위로해 주는 진옥에 대한 고마움이 적혀 있음을 볼 수 있다. 불우한 남편의 생활 속에서 남편에게 위로를 주고, 남편의 마음을 진무해 주는 여자라면 조금도 나무랄 것이 없다는 부인의 글을 받고 송강은 고마웠다. 진옥 역시 부인의 너그러움에 감복하여 더욱 알뜰히 송강을 보살피려 노력하였다. 이런 노력이 송강에 대한 애정으로 굳어져 갔다. 두 사람 사이에는 누구에게서도 발견할 수 없는 뜨거운 애정의 강물이 마음 밑바닥으로 끊임없이 교류되어 갔다. 어느 날, 두 사람이 술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거나해진 송강이 입을 열었다. "진옥아, 내가 한 수 읊을 테니, 너는 그 노래에 화답을 해야 한다." "예, 부르시옵소서." "할 수 있겠느냐? 지체해서는 안 되느니라." "......." 진옥은 말없이 거문고의 줄을 고른다. 정철은 목청을 가다듬어 읊는다. [옥(玉)이라 옥이라 하길래 사람이 만든 모조의 옥으로만 여겼더니, 이제야 자세 보니 반옥이 아니고 참옥(眞玉)일시 분명하구나. 나에게 살송곳(남자의 성기(性器)이 있으니 뚫어 보고 싶구나.] (玉이 옥이라커늘 반옥만 너겨떠니 이제야 보아하니 진옥(眞玉)일시 Ы피求?br> 내게 살송곳 잇던니 뚜러 볼가 하노라) 정철의 노래가 끝나자 지체없이 진옥은 받는다. [쇠(鐵)가 쇠라 하길래 순수하지 못한 쇠로만 여겼더니 이제야 자세 보니 섭철이 아니라 순수한 쇠(正鐵)임에 틀림없구나. 내게 골풀무(여자의 性器)가 있으니 그 쇠를 녹여 볼까 합니다.] (鐵이 鐵이라커늘 섭鐵만 녀겨떠니 이제야 보아하니 正鐵일시 분명하다. 내게 골풀무 잇던니 뇌겨 볼가 하노라.) 정철은 놀랐다. 정말 놀랐다. 진옥의 즉석에서의 화창은 당대의 대문장가 정철을 완전히 탄복하게 하고도 남았다. 송강의 시조에 자자구구 대구 형식으로 서슴없이 불러대는 진옥, 그녀는 정녕 뛰어난 시인이었다. 두 사람의 은유적 표현 역시 뛰어난다. '반옥'은 진짜 옥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모조 玉, '眞玉'은 '참玉'을 뜻하면서, 기생 '眞玉'을 가리키는 것이며, '살송곳'은 '살(肉)송곳'으로 '남자의 성기(性器)'를 은유하고 있는데, 진옥은 쉽게 그 뜻을 알아낸 것이다. 알아냈을 뿐만 아니라 한 술 더 뜬다. '반옥'에 대해서 '섭鐵', '眞玉'에 대해서 '正鐵', '살송곳'에 대해서 '골풀무'의 대(對)는 놀라운 솜씨다. '섭鐵'은 잡것이 섞인 순수하지 못한 쇠요, '正鐵)은 잡것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쇠를 뜻하면서, '鄭澈'을 가리키는 것이며, '골풀무'는 '불을 피우는데 바람을 불어 넣는 풀무'인데 '남자를 녹여내는 여자의 성기(性器)'를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만하면 글자 그대로 '명기(名妓)'이다. 시조집 [권화악부(權花樂府)]에 '鄭松江 與眞玉相酬答'이란 기록이 있다. 이날밤에 송강과 진옥은 뜨겁게 뜨겁게 정염을 불태웠다. 송강의 '살송곳'이 진옥의 '골풀무' 속에서 완전히 녹아져 갔으리라. 이렇게 서로를 이해하던 사이었다. 선조 25년, 임진란을 계기로 그해 5월 오랜 적소의 생활에서 풀려 다시 관로(官路)에 나가게 되었을 때, 송강의 풀림을 기뻐하면서도 보내기 아쉬운 정이 진옥을 눈물짓게 했다. 송강 역시 적소의 생활을 청산하는 기쁨 속에서도 진옥의 일이 마음 아팠다. 마지막 송강을 보내는 자리에서 진옥은 아쉬움을 이렇게 불렀다. [오늘밤도 이별하는 사람 하 많겠지요. 슬프다 밝은 달빛만 물 위에 지네. 애닯다 이 밤을 그대는 어디서 자오. 나그네 창가엔 외로운 기러기 울음 뿐이네.] {인간차야이정다(人間此夜離情多) 낙월창망입원파(落月蒼茫入遠波) 석간금초하처백(惜間今硝何處佰) 여창공청운홍과(旅窓空廳雲鴻過)} 서울에 올라왔을 때, 부인 안씨는 진옥을 데려오도록 권했다. 송강 역시 진옥에게 그 뜻을 물었으나, 진옥은 끝내 거절했고 강계에서 혼자 살며 짧은 동안의 송강과의 인연을 되새기며 나날을 보냈다. 송강이 선조 26년(1593) 12월 18일 강화의 우거에서 생을 마치는 운명의 자리에 소리없이 흐느끼는 여인이 있었다.- 진옥 그녀였다. 그후 진옥은 강계를 떠났다. 그리고 그녀의 그후 일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세의 문장가요, 삼공을 지낸 대정치가 정송강은 그의 파란 많은 정치 생활 속에서도, 강호에 유배되어 은둔 생활을 하면서도, 정치가로서의 강직한 성격의 다른 쪽에 숨은 그 풍류스런 성격이, 그 연군에의 충정이 샘솟듯 솟아오름을 그의 뛰어난 시재와 자유분방한 필치를 유감없이 구사하여 주옥같은 작품을 남겨, 우리의 국문학의 유산을 살찌개 하고 심금을 울려 준다. 그는 국문학사상 '유배문학'이란 독특한 유형을 이룩하기도 하였다. 그는 가사문학의 제1인자이면서도 그의 시조 역시 뛰어난 작품이 수없이 많다. [훈민가]란 연시조를 써서 국민교화의 방법으로 쓰기도 하였다. 어버이 사라신 제 섬길 일란 다 하여라 디나간 휘면 애다라 엇디 하리 평생애 고텨 못할 이리 이뿐인가 하노라 (송강가사) 이 시조는 송강이 [경민편(警民篇)]에서 제목을 [자효(子孝)]라 한 작품인데, 일찍이 송달수는 다음과 같이 한역하고 있다. [태아친재당(苔我親在堂) 위당선사지(謂堂善事之) 어언과료후(於焉過了後) 수회역하추(雖悔亦何追) 평생불가복(平生不可復) 지차이사재(只此而巳哉)] [마을 사람들이여 옳은 일을 하도록 노력하시오 사람으로 태어나서 옳은 일을 하지 못한다면, 마소에게 갓과 꼬갈을 씌워서 밥 먹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마을 사람들하 올한 일 하쟈스랴. 사람이 되어 나셔 올티곳 못하면 마쇼를 갓곳갈 싀워 밥 머기나 다라랴. (송강가사)} 이 시조는 '경민편'에 [鄕閭有禮]란 제목인데, 역시 송달수는 이렇게 한역하였다. [차차인리인(嗟嗟隣里人) 면언위선사(勉焉爲善事) 기수인형생(旣受人形生) 소행반불의(所行反不義) 하이마여우(何異馬與牛) 관건이음식(冠巾而飮食)] 아아 나라의 동량재를 저렇게 마구 죽이면 어이 할 것인가. 헐고 뜯어 내어 이미 기울어진 집에 의논도 분분하구나. 많은 목수들은 먹통과 자만 들고는 허둥대기만 하다다 말려는가 보다. {어와 동냥재를 뎌리 하야 어이 할고 헐뜨기 기운 집의 의논도 하도 할샤 뭇 지위 고자자 들고 헤뜨다가 말려나다.} 당쟁의 와중에서 훌륭한 인재들을 마구 몰아 죽이고 귀양 보내는 정국을 한탄한 노래다. 이 작품은 원통하게 죽은 임사수(林士遂)를 애도한 노래이나 자신의 처지를 풍유한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송강의 스승 김하서의 작품이라고 전하는 데도 있다. 그는 [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 [성산별곡] 등 가사 4편과 [장진주사], [훈민가] 등 시조 84수를 남겼다. [빈 산엔 잎이 지고 궂은 비만 내리는데, 상국(相國)의 풍유로움이 이제는 적막하구나. 슬프다 한 잔 술을 다시 권키 어려우니 옛날의 그대 노래가 바로 그대로구려.] {공산목락우소소(空山木落雨簫蕭) 상국풍류차적막(相國風流此寂寞) 추창일배난경진(추창一盃難更進) 석무가곡즉금조(昔無歌曲卽今朝)} 대문장가 권석주가 송강의 묘를 지나며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한 [과송강묘유감(過松江墓遺感)]이다. [장진주사(將進酒辭)]를 불렀던 주인공도 또한 남의 노래의 객이 되었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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