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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고전)

나라 말아먹은 경국지색-양귀비

AziMong 2007. 4. 14. 22:00
나라 말아먹은 경국지색-양귀비 | 중국의 역사와 문화

한때 ‘거부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는 화장품 광고의 카피가 유행한 적이 있다. 아름다움 앞에는 아무리 이성적이고 현명한 사람이라도 한번쯤은 눈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그 아름다움이 파멸로 이끌 만큼 위험해 보인다고 해도 말이다.
 경국지색, 나라를 기울게 하는 아름다움이라는 말도 있다. 아름다움이 얼마나 지나치면 나라까지 망치겠는가?
범죄와 부정 뒤에는 반드시 미녀가 있다는 말도 있다. 남자로 하여금 올바른 판단과 이성을 흐리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 그 중에서 한자 문화권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미녀로 통하는 여인 양귀비가 있다. 그녀의 매력이 얼마나 지독하고 황홀하였으면 소위 마약성이 있는 식물에게 양귀비꽃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아들의 아름다운 아내
양귀비(719-756)의 본명은 양옥환이다. 그녀는 애초 당 현종과는 시아버지와 며느리라는 관계에 있었다. 사천성 관리의 딸로 태어나 어린시절 부모를 여의고 친척의 집에서 자랐던 양옥환은 16세에 그 미모를 인정받아 당 현종의 수많은 아들 중 하나인 수왕의 비로 궁에 들어간다.
수왕의 아내로 산 것이 6년이 되던 22세의 어느 날. 양옥환은 당 현종 처소의 환관인 고력사의 은밀한 방문을 받는다. 그리고 불려 간 곳이 당 현종의 술자리. 현종은 수왕비를 보자 한눈에 마음이 끌렸다. 수왕비는 빼어난 미모일 뿐 아니라 매우 이지적인 여성으로 음악, 무용에도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술자리에서 현종이 작곡한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의 악보를 보자 그녀는 즉석에서 이 곡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것이었다.
 
그녀의 자태는 마치 선녀가 지상에 하강하여 춤을 추는 듯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수왕비야말로 다름 아닌 후의 양귀비(楊貴妃)로서 현종 황제와 양귀비의 로맨스는 이 만남을 계기로 그 막이 오르게 된다
56세의 시아버지 현종이 22세의 며느리와 사랑을 불태운다는 것은 당시로서도 충격적인 스캔들이 아닐 수 없었다
 
시아버지의 귀비로 들어가다.
그러나 아무리 황제라 하더라도 염치는 있는 법. 아들의 아내를 바로 빼앗을 수 없었던 당 현종은 일단 양귀비를 궁에서 내보내 당분간 화산에서 도가의 여도사(女道士)로 생활하게 한다. 그 사이 아들 수왕에게는 위씨 성을 가진 여인과 재혼하도록 주선한다.
마침내 모든 일이 매끄럽게 처리되고 당 현종은 꿈에도 그리던 여인을 맞을 수 있게 되었다. 양옥환은 귀비에 책봉되어 현종의 비로 다시 궁에 들어온다. 양귀비는 비록 비의 신분이었지만 당 현종이 황후의 자리를 비워둔 채 지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황후와도 같은 권력을 휘둘렀다.
천보 10년(751) 칠월칠석날에 있었던 일이다. 현종은 화청궁에 거동하여 장생전에서 양귀비와 함께 노닐고 있었다. 이윽고 밤이 깊어 하늘에는 은하수가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건만 웬일진지 칠석의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양귀비는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현종은 왜 우느냐고 달래듯 물었으나 양귀비는 그저 울음만을 계속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다. 이윽고 양귀비는 눈물을 닦으면서 띄엄띄엄 그의 심정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하늘에 반짝이는 견우성과 직녀성, 얼마나 아름다운 인연입니까. 저 부부의 지극한 사랑, 영원한 애정이 부럽습니다. 저 부부와 같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에도 자주 기록되어 있지만 나이가 들면 가을 부채처럼 버림을 받는 여자의 허무함, 이런 일들을 생각하면 서글퍼 견딜 수가 없아옵니다......."

양귀비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한 마디 한 마디는 현종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을 손을 서로 붙잡고 그들의 영원한 애정을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에게 맹세하는 것이었다.

"하늘에서는 비익조(比翼鳥)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連理枝)가 될 지이다."

이 뜻을 풀이하면, '비익조'는 중국 전설에 나오는 새로, 암수가 한 몸이 되어 난다는 데서 사이가 좋은 부부를 상징하고, '연리지' 또한 중국 전설에 나오는 나무로, 뿌리는 둘이지만 가지는 합쳐져 하나가 된다는 데서 부부의 깊은 애정을 상징한다. 현종과 양귀비는 이 '비익조' '연리지'처럼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을 맹세한 것이다
당 현종이 양귀비를 맞으면서 당나라는 큰 변화를 맞이한다. 당 현종 치세 전반기는 <개원의 치> 라는 칭호를 받으며 중국 역사상 몇 안되는 태평성세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양귀비를 맞으면서 사랑에 눈이 먼 당 현종에게 정치는 관심 밖의 일이 되었다. 환관과 탐관오리가 득세하면서 일반 백성들은 살림살이는 급속히 몰락하기 시작했고 민심은 흉흉해졌다.

화청지에서의 사랑
그러나 당 현종에게는 오로지 양귀비뿐이었다. 당 현종은 양귀비를 위해 온천인 화청지에 궁을 짓고 오로지 양귀비와 사랑하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양귀비를 자신의 말을 이해하는 꽃, 즉 해어화(解語花) 라 부르며 양귀비의 아름다움 앞에는 꽃조차도 부끄러워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양귀비가 즐겨 먹는다는 이유로 2,000리 밖에서 나는 여주라는 과실을 매일 공수해오도록 하였고 양귀비가 원하는 모든 사치를 다 누리도록 해주었다. 더불어 그녀의 친인척을 궁과 관직에 대거 등용하여 정치를 모두 다 맡겼다. 이때 등용된 양귀비의 6촌 오라비 양국충은 건달출신의 부도덕한 간신배로 당 현종 치세 말기를 부정 부패로 얼룩지게 만들었다.
양귀비는 당 현종의 사랑을 붙잡아 두려고 새로운 화장법을 개발하여 미모를 가꾸었다. 양귀비는 날씬하고 가녀린 미녀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통통한 몸매에 희고 매끄러운 피부를 가졌던 양귀비는 온천물에 몸을 닦고 통통한 몸매를 유지하면서 밤이나 낮이나 당 현종을 자신의 침실로 이끌었다.

안녹산의 난과 양귀비의 죽음
양귀비의 몰락은 당 현종 외에 양귀비가 총애하던 두 남자 사이의 알력에서 시작되었다. 양귀비는 중국 변방 돌궐족 출신의 안록산을 가까이 하였다. 안록산은 일개 군졸에서 시작하여 용맹으로 공을 세워 일약 중앙으로 진출한 인물이었다. 20대의 양귀비는 40대의 안록산을 수양아들로 삼고 그를 매우 가까이 하였다. 일설에는 양귀비가 안록산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당 현종은 안록산과 양귀비의 관계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양귀비가 안록산을 총애하는 것에 비례하여 더욱 안록산을 높은 지위로 등용하였다. 그것이 양귀비의 6촌 오빠인 양국충과 안록산 사이에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양국충은 안록산의 성장에 위협을 느끼고 그를 제거하려 하였다. 이를 눈치 챈 안록산은 변방에서 난을 일으키고 곧 이어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까지 쳐들어 왔다.
양귀비와 함께 급히 피난길에 나선 당 현종이 섬서성 마외파에 이르렀을 때였다. 황제의 가마를 운반하던 병사들이 소동을 일으켰다. 나라를 망친 양귀비와 그 일족을 죽이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가지 않겠다고 주저앉은 것이다. 뒤에선 안록산의 군사가 쫓아오고 피난의 가마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자 다급해진 당 현종도 별수 없이 병사들의 요구에 따라 양귀비의 일족을 주살하였다.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고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귀히 여겼던 양귀비가 인근 절 배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하도록 방치하였다. 안록산의 난이 진압되고 다시 장안으로 돌아온 당 현종은 죽을 때까지 양귀비를 잊지 못했다. 양귀비의 초상화를 앞에 두고 끝내 그녀를 지키지 못한 회한과 그리움 속에서 남은 세월을 보냈다.
잘못된 아름다움은 타인을 미혹하여 판단을 흐리게 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스스로의 목숨마저도 위태롭게 만든다. 그래서 ‘미인 박명’이라는 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예순을 바라보던 현명한 성군, 당 현종의 눈을 흐리게 하여 스스로의 명예도, 나라에 대한 의무도 벗어 던지게 한 양귀비의 매력은 결국 스스로의 명마저 재촉하게 하였다.
여성에게 있어 아름다움은 그 어떤 것보다 가장 축복받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반드시 현명하고 바른 가치관과 함께 빛을 더 발할 수 있다. 양귀비의 고사에서 발견하듯이 그녀가 조금만 더 현명하였더라면 스스로의 목숨도 구하고 더 나아가 당 현종의 치세를 태평 성세로 유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