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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고전)

선덕여왕

AziMong 2007. 4. 14. 22:03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은 신라 27대 왕인 선덕여왕(? ~ 647)임다.
삼국중 유일하게 신라에만 여왕이 한명도 아닌 세명씩이나 등장하는 것은
진골입네 성골입네 따지는 골품제 때문이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정설임다.


26대 진평왕은 딸딸이 아빠라서 장녀인 선덕공주에게 왕위를 물려 줬슴다.
“삼국유사”에도 “성골 성분의 남자가 없어서 여왕이 즉위했다”고 적혀 있는데
최근 공개된 “화랑세기”는 이런 정설에 준엄한 똥침을 날리며 반격을 가함다.
진위여부 논쟁이 끊이지 않는 필사본“화랑세기”의 내용을 압축하자면……


선덕여왕이 진평왕의 장녀라서 왕위에 올랐다는 건 순 구라빨이더라.
선덕의 언니인 천명(天明)공주가 끗발 순으로 치면 대권 경선주자 1순위인데
숙부와의 사랑에 빠진 天明이 ‘사랑밖에 난 몰라’로 연예계에 전격 데뷔하자
가문에 똥칠 범벅을 한 언니는 왕이 될 자격이 없다고 선덕이 박박 대들어
할 수 없이 天明은 대권 포기각서를 제출하고 선덕이 왕이 됐다고 하더라.


天明의 애인은 25대 진지왕의 아들인 용춘(龍春)로 숙부와 조카딸 관계라더라.
진평왕의 맘은 ‘아무래도 여자보다는 남자가 왕 되는게 낫지’싶어서
天明과 용춘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은근슬쩍 인정해 주는 조건으로
용춘을 사위 삼아 왕위를 물려 주려고 통빡을 굴려 인수위원회를 구성했다더라.


그런데 평소 잔머리 팽팽 성격 괄괄한 선덕공주가 음모론을 제기하면서
‘언니인 천명공주가 왕이 되는건 참을 수 있으나
용춘이 단지 남자라는 이유로 왕이 되는 건 대국민 경선 사기극이므로
여성인권위원회에 제소는 물론 분당까지 불사하겠다’고 가두시위 했다더라.


선덕의 파상공세에 코너에 몰린 天明은 사랑을 위해 왕위를 포기하고
용춘과 함께 듀엣으로 ‘귀거래사’를 부르며 여의도를 떠나 갔고
선덕이 진평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고 하더라………..


뭐 대충 이런 내용이 필사본 화랑세기에 전해져내려 옴다만
선덕여왕이 즉위했던 당시는 삼국간의 대립이 최고조에 달했던 때임다.
삼국중 가장 후진국이던 신라가 고구려 백제에게 연신 깨지던 차에
여왕이 즉위하자 더욱 같잖게 보고 시도 때도 없이 찝적거렸슴다.


요즘같은 개방문명사회에서도 여성이 대통령 된다하면 화젯거리아님까?
여성장관만 나왔다 하면 뭐 꼬투리 껀수 없나 살피는 게 울나라 전통인데
당연히 신라의 관료 나부랭이들은 여왕의 딴지걸기에 여념이 없었슴다.


특히 백제의 의자왕은 신라에게 정말 골치아픈 깐죽거리로
선덕여왕을 아주 우습게 알고 뻑하면 전선야곡을 불러 제끼며 쳐들어 옴다.
사실은 의자왕이야말로 선덕여왕의 조카나 다름없는데도 말임다.


이게 어케 된 야그냐 하면 말이죠……
선덕여왕의 막내여동생인 선화공주는 어려서부터 아주 예뻤고
미스 삼국대회에 출전해 그 쭉빵탱탱한 몸매로 우승을 차지했는데
백제국 채점위원이던 왕자 서동이가 사랑에 눈이 멀어 버린 검다.


"사랑찾아 삼만리"에 카메오로 출연한 서동이는 경주에 잠입 후
신라 정보통신부의 메인 시스템을 해킹해서 스팸메일을 띄움다.
그 메일의 내용인 우리나라 최초의 4구체 향가인 “서동요”로서…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정을 통해 두고
서동이를 밤마다 몰래 안고 간다…”


신라의 온 백성은 물론 왕실도 그 메일에 경악했고
뿔딱지 난 아빠 진평왕이 선화공주에게 당장 나가 뒈지라고 거품 물자
선화공주는 궁궐을 떠나 차표 한장 손에 들고 남행열차에 몸을 실었는데
잠복해 있던 서동이가 덥썩 데려다가 부인으로 삼아 버렸다 아님까.

해커 서동이가 훗날의 백제 무왕이고, 의자왕은 무왕의 아들이니
선덕여왕은 의자왕의 큰 이모가 된다 이거죠…아따 복잡하다.


암튼 동네북도 유분수지 이리 채이고 저리 뜯기던 약소국 신라…
그 돌파구로 선덕여왕은 세계최강이던 당태종에게 밀사를 파견해서
“당나라의 도움이 없으면 나는 정치범 수용소에 갇힐지도 몰라요”라며
당나라가 군대를 파견해 신라와의 인계철선을 구축하기를 기대했으나
당태종은 한껏 거들먹 거리며 신라사신을 엿 먹임다.


“니네 나라가 This woman 같은 사람을 덜커덕 왕으로 뽑았으니
고구려 백제가 니네 여왕을 easy woman 으로 알고 노상 침공하는 거다.
일단 차관보 한사람을 신라에 보내 신탁통치를 한 뒤 나라꼴이 안정되면
그때 가서 SOFA 개정에 대해 논의케 할 생각이노라….”


사실상 신라를 속국으로 삼겠다는 당태종의 말에 신라조정은 뒤집어지고
때는 이때다 싶어 수구보수 꼴통 관료똘팍들은 여왕씹기에 열을 올림다.

그러나 선덕여왕은 “여왕 노릇 못 해먹겠다” 따위의 푸념을 늘어 놓기 보다는
당나라를 얼르고 뺨치는 외교정책을 구사하며 실리적인 지원을 얻어 냄다.


그러는 한편 선덕여왕은 자신을 도와 신라중흥을 도모할 인재를 모집하는데
훗날 삼국통일의 주인공인 김유신, 김춘추가 이때 스카우트 된 사람들이죠.


화랑대 생도대장 출신인 김유신은 서라벌계가 아닌 가야계라는 이유로 소외돼
민방위 교관을 지내다가 47살의 늦깎이 나이로 발탁이 된 사람임다.

天明공주와 용춘 사이에서 난 김춘추는 불량 흠집이 있다는 이유로 소외돼
하릴없이 김유신과 더불어 족구나 즐기다가 졸지에 발탁이 된 사람임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꿈으로 첫 손 꼽히는게 바로 “오줌” 꿈 임다.
김유신의 누이동생인 문희는 언니가 꾼 오줌 꿈을 로열티 지불하고 구입하죠.

(꿈에 언니가 오줌을 갈기는데 경주시내를 다 잠기더라는 그 꿈이죠)
그 후 문희는 오빠로부터 친구인 김춘추를 소개받아 결혼에 홀인했으니
김춘추가 바로 통일삼국의 주역 태종무열왕이니 정말 대박 로또 꿈인 셈임다.

또한 김춘추의 엄마 천명공주는 비록 그놈의 사랑 땜시 여왕이 못됐으나
아들이 떡하니 후대에 길이 빛날 무열왕이 됐으니 누이좋고 매부 좋은 거죠.


선덕여왕은 삼국유사에 “지기삼사(知幾三事)”로 표현될 정도로 총명했는데
지기삼사는 어린이 전래동화에 단골로 고정출연하는 대목이라 다들 아실검다.

1.당태종이 보낸 모란 꽃 그림에 나비가 없어 그꽃에 향기가 없음을 알다.

2.男根이 女根에 들어가면 죽는다 하여 女根谷에 잠입한 적군을 물리치다.

3.자신의 죽을 날과 묻힐 장소를 정확히 예언하다.



이렇게 영민한 선덕여왕의 묘수는 평소 소외받는 계층의 인재를 과감히 발탁하여
그들의 한이 엄청난 에너지로 발휘 될 수 있도록 정계개편 하자는데 있었슴다.

그 기대에 어긋남 없이 김춘추는 몸을 내던져 고구려 왜 당나라등을 순회방문 해
끝내 당나라의 군사지원을 얻어내는데 결정적 공헌을 세워 발탁의 은혜를 갚슴다.


선덕여왕의 이러저러한 업적중 가장 상징적인 것은
신라백성들에게 통일신라의 위대한 비전을 제시했다는 것임다.
고구려 백제의 공격에 신음하는 약소국 신라로서는 정말 웅대한 비전이죠.


선덕여왕이 세운 "황룡사 9층탑"은 이런 비전과 의지를 담은 기념물임다.
"1층은 일본, 2층은 중국, 3층은 오월, 4층은 탁라, 5층은 응유,
6층은 말갈, 7층은 거란, 8층은 여진, 9층은 예맥을 진압한다"


비록.... 뻥일지라도, 혹은.... 염원일지라도 얼마나 통이 큽니까?
비전 하나 제대로 없이 허구헌날 내부문제로 깨작거리는 스타일도 아니고
자기 당대에 뭘 이루려고 같잖은 통치행위로 포장한 스타일도 아니라는 검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선덕여왕을 혹평하여 가로되
“여자를 세워 왕이 됐으니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게 다행이다”라고 했지만
선덕여왕의 뒤를 이어 진덕여왕이 즉위했음에도 신라는 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선덕여왕이 제시한 웅대한 비전대로 10년 뒤 삼국을 통일했으니
"꿈*은 이루어 진다"라는 구호는 이럴 때 써야 맞는 말 아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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