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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Ⅲ-(2)기업 식민지,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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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기업과 함께하는 야식 타임.” “야식 먹고 A+ 받으세요. ㄴ기업.” 기업이 대학생들의 밤샘공부까지 돌보는 세상이 됐다. 지난달 중순 기말고사를 치르던 서울대 등 10여개 대학 도서관 앞에 내걸린 이런 ‘야식 나누기’ 현수막 문구를 본 김기호씨(30)는 씁쓸한 기분이었다. 미국에서 인류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그는 1년 만에 모교에 들렀다. “중앙도서관에 특정 기업체 이름이 선명한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어요. 기업체가 대학생들 야식까지 챙기는 건 상징적입니다. 아무리 우리 사회가 ‘기업중심 사회’로 옮아가는 중이라지만 총학생회가 나서서 이런 일을 벌이는 데는 아직 적응이 잘 안됩니다.”
기업의 ‘지원’ 행위는 이미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대동제 등에도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다. 기업은 이제 대학생 후생 복리의 상당부분을 담당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올초 서울의 한 사립대 총학생회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행사에 들인 4611만원 가운데 ‘스폰’(기업체 등의 후원)으로 조달된 금액은 2575만원(55%)이었다.
야식을 지원하는 업체는 식·음료 회사부터 중공업체까지 다양하다. 한 업체는 지난 기말고사 기간에만 서울시내 10개 대학에 2500여만원을 들여 야식을 제공했다. 2005년 하반기부터 8번째다. 업체 관계자는 “‘잠재 인재’를 끌어모으기 위한 마케팅 사업”이라며 “그나마 이런 행사라도 벌여야 취업 준비생들의 관심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업 알리기 방법은 회사 규모에 따라 다르다. 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저희 회사보다 규모가 큰 회사들은 대규모 공모전으로 회사 인지도를 높입니다. 각 대학에 건물 지어주고 회사 이름, 기업 총수 이름을 붙이는 재벌들도 많죠. 특정 대학 특정 학과 학생들을 입도선매하는 회사도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저희 같은 회사는 인력 확보전에서 불리한 싸움을 하고 있어요.”
이미 주요 대학 건물에 ‘삼성관’ ‘LG관’ 등 이름을 새겨넣은 기업들은 ‘반도체학과’ ‘휴대폰학과’ 등을 만들어 ‘맞춤인력 양산’에 나서고 있다. 대학은 ‘인력 공급소’를 자처하고, 정부는 이를 독려한다. 이것이 기업-대학-정부 삼위일체의 신자유주의 지식생산 구조이다.
대학 캠퍼스 내 기업명, 창업자 이름을 그대로 딴 건물이 본격적으로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이다. 서울대 캠퍼스는 90년 SK경영관, 호암관 건립 이후 LG경영관, CJ어학관, 포스코스포츠센터 등 11개 건물에 기업 및 창업주 이름이 새겨졌다. 연세대는 96년 대우관부터 99년 삼성관까지 현재 3개 건물에 기업 이름을 붙였으며, 2008년 완공예정인 120주년기념관을 삼성도서관으로 할지 논의 중이다.
-인재 유치 위해 ‘야식 경쟁’-
진보적 학풍의 성공회대에도 기업과 관련된 건물이 있다. 보복폭행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킨 한화 김승연 회장의 이름을 딴 승연관이 그것이다. 지난 5월 초 총학생회는 “진보 대학 성공회대에 폭력 기업주 이름을 기릴 공간따위는 필요없다”며 ‘건물명 변경’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이 대학 김성수 총장은 최근 김회장의 공판을 방청하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이렇게 기업에 친숙해지는 동안 대학생은 이미 ‘회사원’으로 길러지고 있다. 삼성은 지난해 성균관대에 반도체학과(학부)를 개설한 데 이어 올해부터 휴대폰학과(대학원)를 가동했다. 지난해 11월 삼성전자는 “(휴대폰학과를 통해) 전문화, 고급화된 인력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삼성은 이들 학과에서 ‘맞춤형 인재양성’을 위한 ‘기업 주문형 산학 협동 커리큘럼’을 운영 중이다.
삼성전자는 이밖에 경희대 광운대 인하대 홍익대 등 10여개 대학에 실습기자재 등을 지원, 맞춤형 인재를 공급받는 ‘정보통신 트랙’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하이닉스반도체도 최근 한양대에 나노반도체공학과(대학원)를 개설키로 했다. LG전자도 고려대 공대에 ‘주문형 석사’ 제도를 두고 있다.
대학의 최우선 과제는 취업률 높이기로 변했고, 그 때문에 기업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2005년 대한상공회의소 고위 인사가 “동국대 졸업생을 뽑지 않을 것”임을 시사하자 동국대는 좌파학자인 강정구 교수의 해임 절차를 밟았다. 한 사립대 교수의 설명이다. “대한상의의 ‘취업 불이익’ 발언은 학생들은 물론 대학 당국까지 벌벌 떨게 만들 아킬레스건이었습니다. 정부는 5년 만에 바뀌지만 기업은 훨씬 더 오래 가는 조직이기에 대학으로서는 잘못 보이면 끝장이죠. 어느 대학이든 삼성과 어떤 관계를 맺으면 ‘삼성이 우리 졸업생들에게도 (신입사원) 할당량을 주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하게 됩니다.”
-기업인 한마디에 교수도 해임-
기업은 중·고등학교의 경제교육까지 떠맡으려 하고 있다. “기존 교과서의 반기업적 내용을 바로잡겠다”며 최대의 기업단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지난달부터 ‘차세대 고등학교 경제교과서’ 1만여권을 시중에 내다 팔았다. 일부 대학에서 교양과목 교재로 채택하기도 했다. 최갑수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는 “교과서란 게 공공성을 확보해야 하는 일인데 어떻게 이런 발상이 용인되는지 모르겠다. 삼성공화국의 폐해가 극명하게 드러난 사례”라고 한탄했다.
기업에 장악당하는 동안 대학은 스스로 상업화해 나갔다. “대학은 산업”이라던 2005년 대통령의 말처럼 대학은 수익실현에 몰두하고 있다. 2002년 중앙광장에 지하캠퍼스를 완공한 고려대는 그곳에 스타벅스, 버거킹, 파파이스 등 상업시설을 채웠다. 삼성의 지원을 받은 이화여대도 비슷한 시설을 올해 안으로 완공하게 되며, 서울대도 지하공간 활용에 대한 검토를 벌이고 있다.
굳이 지하상가가 아니더라도 투썸플레이스 커피숍(서울대)처럼 대학 내 상업시설이 즐비하다. 서강대는 국내 최초로 삼성 계열 대형할인점의 캠퍼스 입점을 검토 중이다. 기업이 새 건물을 지어주는 대가로 할인점 영업권을 주는 방식이 유력하다. 부산대도 체육관을 허물고 삼성중공업을 시공사로 쇼핑몰을 건설 중이다. 건국대는 4년 전부터 캠퍼스 내 야구장 부지에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를 지었다.
오창은 중앙대 강사에 따르면 대학에서 일고 있는 일련의 상업화 움직임은 항상 서울의 특정 사립대가 주도했다. 90년대 중반 이 대학이 교내 주차요금을 받기 시작한 뒤 서울대 등 여러 대학이 뒤따라 주차요금소를 설치했다. 오강사는 “그 대학에서 먼저 시도하는 걸 보고 괜찮다 싶으면 다른 대학들이 눈치 보다 따라했다”며 “기부금 입학제, 강의전담 교수제, 계약직교수(6년한도 내 재계약) 등도 마찬가지였다”고 전했다. 그는 대학의 ‘공공성 포기’를 걱정한다.
“요즘 대학은 완전히 수익 구조에 목매는 것 같은데요, 이건 공공성을 포기한 겁니다. 대학은 거점이 돼야 합니다. 옛날에는 반정부 투쟁의 거점이었고, 이제는 반자본 투쟁의 거점이어야 하죠. 정치권력에 대항한 역사에 비교해 보면 자본권력에 대해서는 너무 쉽게 손을 든 것 같아요. 총학도, 학생들도, 교수들도 의지가 없는 상태죠. 오히려 이른바 주요 대학들이 가장 민첩하게 신자유주의화했어요.”
-기업이 교과서까지 만들어-
조정환 문학평론가는 캠퍼스의 변화양상을 ‘대학 공간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성’으로 봤다.
“대학의 시장화가 본격 진행되고 있습니다. 커리큘럼뿐 아니라 공간 자체가 재편성되고 있죠. 할인점 등 편의시설이 들어서고 하면, 학생들 사고가 금방 시장에 적응될 겁니다. 유물론적으로 신자유주의에 동화시키는 것이죠. 노무현 정부가 한 게 신자유주의를 극대화, 효율화시킨 것입니다. 그게 이제 대학의 본래적 기능이 돼 버렸어요.”
자본-대학의 밀월관계 형성에는 정부의 역할이 매우 크다. 교육인적자원부는 지난달 초 ‘대학 교육력 향상 지원방안’을 발표했다. 교육부는 “고등교육의 중심축을 ‘연구중심’에서 ‘교육중심’으로 이동시키겠다” “대학 교육과 산업간 숙련 불일치도 및 신입사원 재교육 비용을 최소화하도록 하겠다”며 기업에 ‘대학 평가권’을 주기로 했다.
기업의 대학평가는 대학을 학문의 전당이나, 비판적 지성의 양성 기관으로서보다 회사원 만들기 공장으로 더 기능하게 만든다. ‘고급인력 수급’에 대한 교육부의 철학은 2005년 ‘제2차 국가인적자원개발기본계획(안)’에 잘 담겨 있다. 우리 대학 교육이 “시장수요 반응형 인력정책이 미흡”(9쪽)하므로 “대학 등의 인력양성 방식이 ‘시장반응형’으로 전환”(21쪽)돼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 교육력 향상 지원방안’에는 사립대에 ▲대학 적립금의 주식 투자 등 수익사업 운영 ▲대학 내 타인 소유의 건축물 설치 등을 허용한다는 내용도 있다. 이제까지의 커피숍 정도가 아니라 향후 극장, 스포츠센터, 주차장 등의 상업시설이 캠퍼스 내에 당당히 들어설 수 있게 된다.
이에 대해 노동해방학생연대는 이 정책을 강력히 비판했다. “정부는 언제나 자본이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대학에서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고민한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에 의한 대학 평가’는 대학을 더 철저하게 자기 손아귀에 두려고 하는 자본의 의도이다.” 이 단체는 또 “사립대의 이월적립금이 총 5조7000억원에 달하지만 등록금은 매년 오른다. 이런 가운데 이뤄질 주식투자 허용 방안은 사학 자본이 더욱 쉽게 돈벌이하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비판의 목소리는 반향이 크지 않다. 대학에서 이런 비판은 그저 비주류적 견해의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메아리 없는 함성이 된 지 오래다.
요즘 ‘친기업적’이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 학문은 학문으로서 생존할 수 있을지 기로에 서있다. 기업이 관심을 두지 않는 분야는 취업에 불리하고, 그런 분야에 학생이 지원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정부도 취업률 낮은 학과의 퇴출을 권장하고 있다. 2005년 8월 교육부가 낸 ‘중장기 인력수급 전망과 분석’ 보고서는 “시장수요가 적은 학과(전공)를 중심으로 학생 정원을 축소하고, 비교우위 분야로 특성화시킨다. 대학 구조개혁 가속화를 위한 신호를 제공해 자율적 구조조정을 유도한다”(19쪽)는 계획을 담고 있다.
-정부가 앞장서 ‘대학 기업화’-
교육부의 개혁 원칙은 방만한 일부 대학의 구조조정을 이끌었지만, ‘시장수요가 적은’ 학과의 폐과(廢科) 도미노를 초래했다. 2003년 경원대를 비롯해 지난해까지 3년간 전국 12곳의 대학에서 철학과가 사라졌다. 같은 기간 전국에서 독어독문학과와 불어불문학과도 각각 4곳씩 폐과됐다. 동국대도 최근 독문과와 북한학과의 정원을 50%씩 줄이고, 철학과·독문과를 묶어 철학윤리문화학부로 재편키로 했다. 또 이 대학은 향후 취업률이 낮은 학과의 정원을 줄이고, 그만큼의 정원을 취업률이 높은 학과에 넘길 방침이다.
이득재 대구가톨릭대 노문과 교수는 정부의 ‘유도’대로 뒤따라가는 대학의 행보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정부가 만든 놀이터에서 놀림당하고 있는 꼴입니다. 항상 교육정책이든, 대학정책이든 이미 관료들(정부)에 의해 모든 틀이 다 짜여 있는 상태에서 지식인들(대학)이 토론하고 의사를 표현합니다. 정부의 논의구조 안에서만 발언하고 있을 뿐이지요. 삼성경제연구소의 ‘지식생태계’ 담론 등에서 보듯 자본은 엄청나게 빨리 움직이고 있는데 지식인 사회는 외국 이론과 교과서에만 매몰된 채 현장을 둘러보지 않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교육부 ‘교육인적자원 통계’에 따르면 대학원생들도 시장수요에 영향을 받고 있다. 2001년 철학과 대학원생(일반대학원 석사과정)은 전국에 413명이 있었지만 2004년 398명으로 3.6% 줄었다. 같은 기간 독어독문학과 대학원생은 45%(193명에서 106명), 사학과도 13.5%(550명에서 476명) 각각 줄었다. 반면 ‘시장수요’가 많은 경영학과의 경우 3108명에서 3280명으로 5.5%, 컴퓨터공학과는 950명에서 1225명으로 28.9% 각각 늘었다.
신용옥 ‘내일을 여는 역사’ 편집장은 “요즘 사람들은 ‘역사 드라마나 게임산업 등에 인문학이 기여할 수 있다’고 해야, 즉 돈으로 연결시켜야 비로소 인문학 지원에 수긍하는 분위기”라며 “인문학이 가진 본연의 정체성이 성립하지 않는 시대”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이건희 회장 명예 철학박사 수여에 반대한) 고려대생들이 학교측의 제재를 받았을 때 한 마디도 하지 않던 교수들이 인문학의 위기를 얘기할 자격은 있는 건가 의심스럽다”면서 “자기 밥벌이, 소시민적 목소리나 낼 뿐 사회적인 얘기는 못하는 구조가 지금의 지식인 사회”라고 덧붙였다.
신정완 성공회대 교수는 “기업의 대학평가란 게 단순히 ‘전자공학 비중을 더 키우라’고 요구하는 수준이 아니라 해당 대학의 교육 성향이나 교수들의 이념 성향, 학생운동에 대한 평가 등 정치·사회적인 측면에까지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신교수는 매우 비관적이었다.
“기업의 요구는 학생의 진로와 직결되는 문제인 동시에 대학 측의 학생 수급으로 다시 이어집니다. 결국 기업에 유용하지 않은 학생을 양산하는 대학과 학과는 이제 ‘효율성’이란 이름 아래 퇴출되겠죠. 대학은 사회에 필요한 지식을 생산하고 유용한 사람을 길러내는 일을 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대학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격차들을 해소하고 민주시민의 덕성을 갖추도록 해줘야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지금 추세라면 기업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보여줄 대졸자나 대학도 줄어들고 말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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