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있는 뿌리깊은 이야기
조선시대 3대 명기 운초 김부용 본문
김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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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옆으로 200m즘 산을 향하여 들어가면 황진이(黃眞伊), 이매창(李梅窓)과 함께 조선 3대명기(名妓) 중의 한 사람이라는, 부용상사곡(芙蓉想思曲)의 주인공 김부용(金芙蓉)의 시비가 서 있고, 거기에서 7-800m즘 산으로 올라간 곳에 부용의 무덤이라고 전하는 초라한 한기의 무덤이 있다.
성천(成川) 기생이었던 부용은 얼굴도 아름다웠지만 시문에도 능해서 명성이 높았고, 그의 문집인 ‘부용집’에 150편의 시가 실려 전해 오고 있다.
정조 때 판서를 지낸 연천 김이양(淵泉 金履陽)이 77세일 때 19세의 꽃다운 나이에 인연을 맺었고 김이양이 죽은 후에 기생의 몸으로 어렵게 수절하다가 그의 묘 옆에 묻히고 싶어 이곳까지 찾아와 죽었지만 끝내 그 옆에는 묻히지 못하고 같은 산자락인 이곳에 누웠다는 애틋한 사연이 전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절개를 기려 그의 묘를 ‘초당마마의 묘’라고 불러 온단다.
. 봄은 가고 꽃이 지니 야위는 얼굴
다시금 다듬어도 꽃답지 않네 못 잊어 이 상사(想思) 못 버린다 해도 상봉보다 상사가 오히려 나은 것을 만났던 옛 정보다 그리는 정이 더 좋아 먼저 세상을 떠난 늙은 남편 김이양을 그리는 시인 듯 하다. 차가운 바람을 가르고 미끄러운 산길을 오르면서, 황진이 무덤을 찾아서 시 한 수를 읊느라고 부임 길이 늦어져 파직까지 당했던 백호 임제(白湖 林悌)의 고사가 생각나서 고소를 금치 못했다. |
▶ 운초 김부용
김부용은 조선시대 삼대명기(三大名妓: 황진이, 김부용, 이매창)이다. 정조, 순조임금동안 여류시인으로서 49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하였다. 타고난 미색이 출중하고 남달리 총명하였으며, 시문이 뛰어났다고 한다. 김부용이 여섯날 되던해 부모를 여위는 불운 때문에 부득히 기생되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운초(雲楚)라는 기명으로 성천고을의 기적에 오르게 된다.
평양감사로 있었던 김이양의 첩실이 되어 남편을 따라 광덕산에 뒷산에 묻혔다고 전한다. 그의 저서는 운초시집과 오강루문집이 있다.
▶ 찾아가는 길
운초 김부용 안내판.
광덕사로 들어서는 바로 입구에 운초 김부용묘를 알리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묘소는 쉽게 찾을 수 있으며 이 안내판을 보고 다리를 건너면, 운초 김부용 시비가 보인다. 이 산길을 따라 가면 운초의 묘가 있다.
▶ 김부용 묘
- 소유 : 천안시
- 소유 : 천안시
- 규모 : 분묘 1기
- 시대 : 조선시대
- 위치 : 광덕면 광덕리(광덕산)
운초 김부용 묘소
운초 김부용 묘소
김부용 묘소는 광덕사입구에서 김부용 시비를 비고 약 1킬로미터 산으로 올라가면 볼수 있다. 김부용이 이곳에 묻히게 된 저서는 없으나 김이양이 죽고 수절하던 그녀가 김이양과 같이 묻어달라고 유언했으나 소실의 신분으로 묻히지 못하고 가까운 이곳에 묻혔다고 한다.
1974년 이 묘를 찾아낸후 천안문화원의 주최로 추모행사를 갖고 있다. 묘소는 잡초제거가 잘 되어 있으며 묘비가 있다. 묘비 앞면에는 "詩人雲楚金芙蓉之墓"라 했고, 뒤면에는 설립목적을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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