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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빨갱이몰아 때리고 물고문 집총거부자 ‘고의적 타살’

AziMong 2009. 1. 17. 07:18

[단독] 빨갱이몰아 때리고 물고문 집총거부자 ‘고의적 타살’

한겨레 | 기사입력 2009.01.16 07:41 | 최종수정 2009.01.16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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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군 '여호와의 증인' 사망 "국가책임"


박정희 강제징집 '한몫'…'군인 만든다' 가혹행위


맞다맞다 병원서 숨지고 신념 지키려 자살 택해

15일 군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군의문사위)가 밝힌 진상조사 결과로, 1970~80년대 종교적 이유로 집총을 거부한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은 군내에서 무자비한 폭력과 가혹 행위에 시달리다 목숨을 잃은 사실이 드러났다. 이들은 군사독재 시절 '인간 대접이 필요없는 빨갱이'란 낙인이 찍혀 폭력의 희생양이 됐다.

"콘크리트 물탱크에 머리를 집어넣었다가 숨을 못 쉬고 버둥거리면 머리를 다시 꺼내기를 수차례 반복했습니다. 말하자면 물고문이죠."

여호와의 증인 신자 고 김종식씨가 군내에서 당한 가혹 행위를 목격한 한 행정병이 군의문사위 조사에서 진술한 내용이다. 1975년 10월 훈련소에 입소해 집총을 거부한 김씨는 교관의 모진 구타로 쓰러져 국군 대전통합병원으로 후송됐다. 훈련소 부대원들은 교관들이 김씨를 "곡괭이 자루로 1시간 반 동안 수십 대씩 때리"거나 "추운 겨울날 팬티 바람으로 연병장 점호대에 세워 놓는" 가혹 행위를 수시로 반복했다고 진술했다. 입대 전부터 장티푸스를 심하게 앓던 김씨는 결국 훈련소 입소 20여일만에 뇌압 상승으로 숨졌다.

종교적 신념을 포기한 죄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81년 8월 숨진 고 김선태씨는 훈련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드럼통 고문'을 당했다. 당시 김씨의 조교였던 한 부대원은 "내리막길에서 김씨를 드럼통 안에 넣고 굴리는 행위가 몇시간씩 반복됐다"고 진술했다. 김씨가 "훈련을 받겠다"고 약속하자 가혹행위는 그쳤지만, 그는 몇 시간 뒤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부대 근처 배밭에서 목을 매 숨졌다.

군의문사위는 당시 '100% 입대 달성'을 독려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강제징집 정책이 이들의 희생을 키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군의문사위는 박 전 대통령이 73년 1월20일 국방부를 순시한 자리에서 '앞으로 법을 만들어서라도 병역을 기피한 본인과 그 부모가 이 사회에서 머리를 들고 살지 못하는 사회 기풍을 만들도록 하라'고 지시한 문건을 확인했다. 병무청은 74년 1월~6월 병역기피자 원인별 발생 분포를 조사해 여호와의 증인 신자가 63%로 가장 높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고 이들을 사실상 강제입대시켰다. 각 지방병무청장은 관할 구역 내 입대 대상 신자들을 지속적으로 추적해 기피자는 검·경을 동원해 검거하는 방침을 세웠다. 실제 75년 3월9일엔 부산 가야왕국회관 등 19개 집회소를 급습, 63명의 여호와의 증인 신자를 검거해 입대시키는 이른바 '3·9 사태'가 벌어졌다.

강제징집된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은 '빨갱이 보다 못한' 교화의 대상이었다. 당시 헌병으로 복무했던 한 참고인은 "여호와의 증인을 빨갱이로 인식하다 보니 이유 없이 때렸고 근무자가 바뀔 때마다 구타를 했다"고 말했다. 또다른 참고인은 "훈련소장이 '한 순간도 놀리지 말고 반드시 재복무 하도록 하라'는 지침을 내려 이들을 굴릴 계획을 짜는데 골몰했다"고 진술했다. 권오성 기자 sage5t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