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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50돌] 4·19세대 '기억과 회한' 본문
[한겨레] [4·19 혁명 50돌] 4·19세대 '기억과 회한'
"투표함에 미리 자유당표…3·15선거 역대 가장 추잡"
"학생 시위에 시민 동참…경찰이 연행된 사람 격려도"
"하고 싶지 않아요."
1959년 봄 대구 경북여고에 다니던 신구자(68)씨는 교무실에서 선생님과 긴 말싸움을 벌였다. 교사는 신씨에게 "원고는 선생님이 써주고, 대학 갈 때 장학금도 나올 테니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을 축하하는 웅변을 하라"고 다그쳤다. 신씨는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당시는 학생들에 대한 억압이 대단하던 땐데…, 그런 상황을 만든 대통령을 위해 축하 웅변 따윈 하기 싫었거든요."
1년 뒤인 1960년 2월28일. 학생회장이 된 신씨는 "학생들을 정치 도구화하지 말라"며 거리시위에 나섰다. 3월15일로 다가온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국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돈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28일은 일요일이었지만, 대구에서는 이날 오후 2시로 잡힌 민주당 유세에 학생들이 참가하지 못하도록 등교한 학생들을 무작정 붙들어 놓고 있었다. 신씨는 "집에 보내주면 친구들과 곧바로 집으로 가겠다"고 교사와 약속한 뒤 학교를 빠져나와 유세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구 시내는 학교의 부당한 조처에 분노한 경북고·대구고·경북사대부고 학생들의 함성에 점령된 뒤였다. 이들은 대구 반월당을 거쳐 도청 근처로 행진하며 "민주주의를 살리고, 학원에 정치세력을 배제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신씨는 민주당 유세가 열리기로 했던 방천 방향으로 가다 경찰에 잡혔다.
임헌영(69) 민족문제연구소장은 "3·15 부정선거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당시 그는 안동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경북 의성에 있는 모교 조문국민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가 근무하던 학교가 투표소였다. 3인조장, 5인조장, 9인조장이라는 사람들이 있어 자기 조원이 어디에 찍었는지를 확인한 뒤 용지를 투표함에 넣게 했다. 9인조장에게는 완장도 있었다. 그는 "그런 추잡한 선거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고 말했다.
이전 선거에서 꾸준히 야당 성향을 보여온 경남 마산의 부정선거는 다른 지역보다 더 심했다. 민주당 마산시당 간부들은 투표 당일인 3월15일 아침 7시 경찰 포위를 뚫고 투표소에 들어가 투표함의 4할이 이미 자유당 표로 채워진 이른바 '4할 사전투표'가 이뤄졌음을 확인했다. 1만여명의 시위대는 저녁 8시께 자산동 무학국민학교에서 시청으로 행진하며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 속에 마산상고 2학년생 박종학(71)씨가 있었다. 그는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여러 사람이 모였지만 그렇게 많은 이들이 죽고 다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해가 지자 마산시청 개표장 앞에 모인 1만여명의 군중을 향해 경찰의 최루탄과 실탄 사격이 시작됐다. 박씨는 "차 위에서 총을 쏘는 경찰과 픽픽 쓰러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박씨는 그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았지만, 이후 경찰에 끌려가 '시위의 배후가 누구인지 대라'며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다.
그해 건국대 정치학과 4학년이던 복진풍(72·전 환경관리공단 이사장)씨는 "부정선거 반대, 민주주의 회복은 3·15 선거를 앞둔 당시 한국 사회의 시대정신이었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올바른 선거가 치러진다면 반드시 민주당이 이길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유세가 시작되기도 전에 민주당 대통령후보인 조병옥 박사가 갑자기 숨을 거둔 거예요. 여기에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기붕씨를 부통령으로 억지로 만들려다 그 사단이 난 거죠." 그는 "서울의 대학생들은 대부분 시골 출신이었는데, 고향에 내려가면 어른들로부터 '왜놈들 때도 학생들이 먼저 독립운동을 했는데 지금이라고 못할까' 하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동료 학생들과 함께 '공명선거 추진 전국학생위원회'를 만들어 3·1절 41주년 기념식이 열린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부정선거 감행하면 백만학도 궐기한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삐라(전단)를 뿌렸다. 부정선거에 반대한 서울의 최초 움직임인 이른바 '3·1 삐라사건'이다.
마산에서 실종돼 많은 이들의 애를 태우던 김주열의 주검은 4월11일 떠올랐다. 고려대 법대생이던 홍영유(71)씨는 "당시 지방 학생들의 시위 소식을 접하면서 서울의 대학생들도 뭔가를 해야 하지 않느냐라는 혁명적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고 말했다. 마침내 4월18일 낮 12시50분. '인촌 동상 앞으로'라는 구호와 함께 3000여명의 고려대생이 집결했다. 이들은 '기성세대는 자성하라'는 내용의 선언문을 발표한 뒤 경찰 저지선을 뚫고 서울 태평로 국회의사당(지금의 서울시의회) 앞까지 진출했다. 홍씨는 "시민들은 행렬에 결합하거나, '저녁에 막걸리나 사 마시라'며 돈이 담긴 봉투를 건넸다. 종로서에 연행된 학생들에게는 경찰이 '고생한다'며 보리차를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승리는 짧았지만 5·18-6월항쟁 뿌리 돼"
4·19뒤 정권 국민뜻 외면…허무주의 빠지기도쉽게 그때 일 잊어버려 혁명정신 훼손되는 지경
오후 6시, 집회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던 고대생들과 시민들에게 종로4가 천일극장 부근에서 쇠갈고리·곡괭이·쇠사슬 등으로 무장한 깡패들이 달려들었다. 임화수·이정재 등 정치깡패들이 이끌던 반공청년단 폭력배들이었다. 수십명이 피를 흘리며 거리에 쓰러졌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복진풍씨는 "나는 광장시장 골목으로 도망쳐 습격을 피했지만, 참 처참한 광경이었다"고 말했다. 학생 1명이 깡패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소문(나중에 오보로 밝혀짐)이 밤새 서울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일촉즉발의 긴장감 속에 4월19일이 밝았다. 서울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 게시판에 학생들의 궐기를 촉구하는 격문이 나붙었다. 오전 8시30분 신설동의 대광고생들을 시작으로 서울의 주요 대학과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성난 시위대는 국회의사당이 있던 세종로·태평로, 경무대 방향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동국대 정치학과 4학년이던 이우대(73)씨는 경무대로 향하는 효자동 골목에 있었다. 효자동 골목에는 이미 경무대를 사수하기 위한 경찰의 바리케이드가 설치돼 있었다. "주변에 공사에 쓰려고 놓아둔 커다란 파이프가 있더군요. 그걸 굴려가며 경무대 쪽으로 나아갔습니다." 경찰과 시위대의 거리가 50m 정도로 좁혀졌을 때 경찰의 실탄 발포가 시작됐다. 동료들이 피를 흘리며 무너져내렸다. 경찰에 쫓긴 이씨는 주변 민가의 담을 넘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날 효자동 골목에서만 21명이 죽고 172명이 다쳤다. 서울 곳곳이 시위대에 점령된 채 시위가 이어지자 서울 일대에 게엄령이 선포됐다.
그로부터 엿새 뒤인 4월25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 △3·15 부정선거 재실시 등의 내용을 담은 전국 교수 258명의 교수 시국선언이 발표됐다. 매카너기 주한 미국대사는 그날 밤, 서명에 참여한 교수들의 서명과 사진을 들고 이 대통령을 찾아가 하야를 설득했다. 결국 이 대통령은 이튿날인 4월26일 오전 10시30분 전격 하야를 선언했다. 4·19혁명이 승리하는 순간이었다. 혁명의 과정에서 시민·학생 185명이 숨졌고, 348명이 다쳤다.
4·19의 짧은 승리는 머잖아 짓밟혔고, 상처 받은 사람들의 긴 인생이 남았다. 광주고 3학년으로 시위에 참여했던 박상욱(68)씨는 "4·19 이후 국민들의 뜻을 반영하지 않는 민주당 정권에 크게 실망하고 허무주의에 빠진 이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4·19 직후 그는 대입도 포기한 채 낙향해 농사를 지었다. 5·16 쿠데타가 터졌을 때는 군부를 지지했다. 1962년 다시 시험을 봐 고려대에 입학한 뒤에는 한번도 데모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4·19는 위대했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건 데모가 아니라 말없는 착실한 사람들이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
대구의 신구자씨에게 2·28은 거추장스런 '꼬리표'가 됐다. 그는 시위를 주도했던 전력 때문에 취직할 수 없었고, 아이를 낳은 뒤에야 담당 형사로부터 "이제 곧 관리명단에서 빠질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자식들은 자유로운 나라에서 살게 해주고 싶어, 신씨는 1980년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민을 떠났다.
고려대생이던 홍영유씨는 2학기부터 다시 사법고시 준비에 매진했지만 뜻을 이루진 못했다. 1966년부터 < 사상계 > 에서 활동하다가 68년부터는 신민당 기관지인 < 민주전선 > 편집장을 맡았다. 그러나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펜을 꺾었다. 이후 평범한 생활인의 길을 걸었다. 홍씨는 "66살이 되어 인생을 돌아보니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아는 4·19를 기록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5년 동안 자료를 모아 최근 < 4·19혁명 통사 > (전 10권)를 펴냈다. 여기서 통은 '통할 통(通)'이 아닌 '아플 통(痛)'이다. 그는 "4·19는 박정희 정권의 등장으로 완전히 파괴됐기에 아픔"이라고 말했다.
마산의 박종학씨도 유신 독재를 견디지 못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가 최근 귀국했다. 돌아온 조국에서 3·15는 어느새 국가기념일로 지정됐고 희생자들의 묘는 국립묘지가 됐다. 그는 "너무 쉽게 잊고 용서해버려서 가해자들조차 민주화를 위해 흘린 피를 팔아먹는 지경까지 온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부터 3월이 되면 좋은 쌀을 골라 술을 빚어, 그날 희생된 동지들의 제단 앞에 올리고 있다.
효자동에서 경찰의 총탄을 피하던 이우대씨는 "4·19 이후 정치활동을 하다가 5·16 이후 모든 활동을 접고 평범한 생활인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90년대 초 잠시 정치에 욕심을 냈다가 꿈을 접었다. 그는 "4·19 주역 가운데도 군사정권에 편승한 사람들은 출세했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고 말했다. "제 인생요? 저 스스로는 굉장히 보람있게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결과적으로 가장 성공하지 못한 인생이 된 거죠. 그래도 4·19의 토대 위에서 이 나라가 선 거죠. 그 정신이 5·18과 6월항쟁의 뿌리가 됐잖아요. 그럼 된 거죠. 암, 암요."
"투표함에 미리 자유당표…3·15선거 역대 가장 추잡"
"학생 시위에 시민 동참…경찰이 연행된 사람 격려도"
"하고 싶지 않아요."
1년 뒤인 1960년 2월28일. 학생회장이 된 신씨는 "학생들을 정치 도구화하지 말라"며 거리시위에 나섰다. 3월15일로 다가온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국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돈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28일은 일요일이었지만, 대구에서는 이날 오후 2시로 잡힌 민주당 유세에 학생들이 참가하지 못하도록 등교한 학생들을 무작정 붙들어 놓고 있었다. 신씨는 "집에 보내주면 친구들과 곧바로 집으로 가겠다"고 교사와 약속한 뒤 학교를 빠져나와 유세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구 시내는 학교의 부당한 조처에 분노한 경북고·대구고·경북사대부고 학생들의 함성에 점령된 뒤였다. 이들은 대구 반월당을 거쳐 도청 근처로 행진하며 "민주주의를 살리고, 학원에 정치세력을 배제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신씨는 민주당 유세가 열리기로 했던 방천 방향으로 가다 경찰에 잡혔다.
임헌영(69) 민족문제연구소장은 "3·15 부정선거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당시 그는 안동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경북 의성에 있는 모교 조문국민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가 근무하던 학교가 투표소였다. 3인조장, 5인조장, 9인조장이라는 사람들이 있어 자기 조원이 어디에 찍었는지를 확인한 뒤 용지를 투표함에 넣게 했다. 9인조장에게는 완장도 있었다. 그는 "그런 추잡한 선거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고 말했다.
이전 선거에서 꾸준히 야당 성향을 보여온 경남 마산의 부정선거는 다른 지역보다 더 심했다. 민주당 마산시당 간부들은 투표 당일인 3월15일 아침 7시 경찰 포위를 뚫고 투표소에 들어가 투표함의 4할이 이미 자유당 표로 채워진 이른바 '4할 사전투표'가 이뤄졌음을 확인했다. 1만여명의 시위대는 저녁 8시께 자산동 무학국민학교에서 시청으로 행진하며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 속에 마산상고 2학년생 박종학(71)씨가 있었다. 그는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여러 사람이 모였지만 그렇게 많은 이들이 죽고 다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해가 지자 마산시청 개표장 앞에 모인 1만여명의 군중을 향해 경찰의 최루탄과 실탄 사격이 시작됐다. 박씨는 "차 위에서 총을 쏘는 경찰과 픽픽 쓰러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박씨는 그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았지만, 이후 경찰에 끌려가 '시위의 배후가 누구인지 대라'며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다.
그해 건국대 정치학과 4학년이던 복진풍(72·전 환경관리공단 이사장)씨는 "부정선거 반대, 민주주의 회복은 3·15 선거를 앞둔 당시 한국 사회의 시대정신이었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올바른 선거가 치러진다면 반드시 민주당이 이길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유세가 시작되기도 전에 민주당 대통령후보인 조병옥 박사가 갑자기 숨을 거둔 거예요. 여기에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기붕씨를 부통령으로 억지로 만들려다 그 사단이 난 거죠." 그는 "서울의 대학생들은 대부분 시골 출신이었는데, 고향에 내려가면 어른들로부터 '왜놈들 때도 학생들이 먼저 독립운동을 했는데 지금이라고 못할까' 하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동료 학생들과 함께 '공명선거 추진 전국학생위원회'를 만들어 3·1절 41주년 기념식이 열린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부정선거 감행하면 백만학도 궐기한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삐라(전단)를 뿌렸다. 부정선거에 반대한 서울의 최초 움직임인 이른바 '3·1 삐라사건'이다.
마산에서 실종돼 많은 이들의 애를 태우던 김주열의 주검은 4월11일 떠올랐다. 고려대 법대생이던 홍영유(71)씨는 "당시 지방 학생들의 시위 소식을 접하면서 서울의 대학생들도 뭔가를 해야 하지 않느냐라는 혁명적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고 말했다. 마침내 4월18일 낮 12시50분. '인촌 동상 앞으로'라는 구호와 함께 3000여명의 고려대생이 집결했다. 이들은 '기성세대는 자성하라'는 내용의 선언문을 발표한 뒤 경찰 저지선을 뚫고 서울 태평로 국회의사당(지금의 서울시의회) 앞까지 진출했다. 홍씨는 "시민들은 행렬에 결합하거나, '저녁에 막걸리나 사 마시라'며 돈이 담긴 봉투를 건넸다. 종로서에 연행된 학생들에게는 경찰이 '고생한다'며 보리차를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승리는 짧았지만 5·18-6월항쟁 뿌리 돼"
4·19뒤 정권 국민뜻 외면…허무주의 빠지기도쉽게 그때 일 잊어버려 혁명정신 훼손되는 지경
오후 6시, 집회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던 고대생들과 시민들에게 종로4가 천일극장 부근에서 쇠갈고리·곡괭이·쇠사슬 등으로 무장한 깡패들이 달려들었다. 임화수·이정재 등 정치깡패들이 이끌던 반공청년단 폭력배들이었다. 수십명이 피를 흘리며 거리에 쓰러졌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복진풍씨는 "나는 광장시장 골목으로 도망쳐 습격을 피했지만, 참 처참한 광경이었다"고 말했다. 학생 1명이 깡패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소문(나중에 오보로 밝혀짐)이 밤새 서울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일촉즉발의 긴장감 속에 4월19일이 밝았다. 서울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 게시판에 학생들의 궐기를 촉구하는 격문이 나붙었다. 오전 8시30분 신설동의 대광고생들을 시작으로 서울의 주요 대학과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성난 시위대는 국회의사당이 있던 세종로·태평로, 경무대 방향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동국대 정치학과 4학년이던 이우대(73)씨는 경무대로 향하는 효자동 골목에 있었다. 효자동 골목에는 이미 경무대를 사수하기 위한 경찰의 바리케이드가 설치돼 있었다. "주변에 공사에 쓰려고 놓아둔 커다란 파이프가 있더군요. 그걸 굴려가며 경무대 쪽으로 나아갔습니다." 경찰과 시위대의 거리가 50m 정도로 좁혀졌을 때 경찰의 실탄 발포가 시작됐다. 동료들이 피를 흘리며 무너져내렸다. 경찰에 쫓긴 이씨는 주변 민가의 담을 넘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날 효자동 골목에서만 21명이 죽고 172명이 다쳤다. 서울 곳곳이 시위대에 점령된 채 시위가 이어지자 서울 일대에 게엄령이 선포됐다.
그로부터 엿새 뒤인 4월25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 △3·15 부정선거 재실시 등의 내용을 담은 전국 교수 258명의 교수 시국선언이 발표됐다. 매카너기 주한 미국대사는 그날 밤, 서명에 참여한 교수들의 서명과 사진을 들고 이 대통령을 찾아가 하야를 설득했다. 결국 이 대통령은 이튿날인 4월26일 오전 10시30분 전격 하야를 선언했다. 4·19혁명이 승리하는 순간이었다. 혁명의 과정에서 시민·학생 185명이 숨졌고, 348명이 다쳤다.
4·19의 짧은 승리는 머잖아 짓밟혔고, 상처 받은 사람들의 긴 인생이 남았다. 광주고 3학년으로 시위에 참여했던 박상욱(68)씨는 "4·19 이후 국민들의 뜻을 반영하지 않는 민주당 정권에 크게 실망하고 허무주의에 빠진 이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4·19 직후 그는 대입도 포기한 채 낙향해 농사를 지었다. 5·16 쿠데타가 터졌을 때는 군부를 지지했다. 1962년 다시 시험을 봐 고려대에 입학한 뒤에는 한번도 데모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4·19는 위대했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건 데모가 아니라 말없는 착실한 사람들이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
대구의 신구자씨에게 2·28은 거추장스런 '꼬리표'가 됐다. 그는 시위를 주도했던 전력 때문에 취직할 수 없었고, 아이를 낳은 뒤에야 담당 형사로부터 "이제 곧 관리명단에서 빠질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자식들은 자유로운 나라에서 살게 해주고 싶어, 신씨는 1980년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민을 떠났다.
고려대생이던 홍영유씨는 2학기부터 다시 사법고시 준비에 매진했지만 뜻을 이루진 못했다. 1966년부터 < 사상계 > 에서 활동하다가 68년부터는 신민당 기관지인 < 민주전선 > 편집장을 맡았다. 그러나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펜을 꺾었다. 이후 평범한 생활인의 길을 걸었다. 홍씨는 "66살이 되어 인생을 돌아보니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아는 4·19를 기록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5년 동안 자료를 모아 최근 < 4·19혁명 통사 > (전 10권)를 펴냈다. 여기서 통은 '통할 통(通)'이 아닌 '아플 통(痛)'이다. 그는 "4·19는 박정희 정권의 등장으로 완전히 파괴됐기에 아픔"이라고 말했다.
마산의 박종학씨도 유신 독재를 견디지 못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가 최근 귀국했다. 돌아온 조국에서 3·15는 어느새 국가기념일로 지정됐고 희생자들의 묘는 국립묘지가 됐다. 그는 "너무 쉽게 잊고 용서해버려서 가해자들조차 민주화를 위해 흘린 피를 팔아먹는 지경까지 온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부터 3월이 되면 좋은 쌀을 골라 술을 빚어, 그날 희생된 동지들의 제단 앞에 올리고 있다.
효자동에서 경찰의 총탄을 피하던 이우대씨는 "4·19 이후 정치활동을 하다가 5·16 이후 모든 활동을 접고 평범한 생활인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90년대 초 잠시 정치에 욕심을 냈다가 꿈을 접었다. 그는 "4·19 주역 가운데도 군사정권에 편승한 사람들은 출세했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고 말했다. "제 인생요? 저 스스로는 굉장히 보람있게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결과적으로 가장 성공하지 못한 인생이 된 거죠. 그래도 4·19의 토대 위에서 이 나라가 선 거죠. 그 정신이 5·18과 6월항쟁의 뿌리가 됐잖아요. 그럼 된 거죠. 암, 암요."
오그라든 ‘4·19 교육’…고교서도 선택과목에
한겨레 | 입력 2010.04.18 22:10 | 누가 봤을까? 10대 남성, 제주
[한겨레] [4·19 혁명 50돌] 중등교과서로 본 실태
'한국사' 선택 전환…못배운 채 졸업할수도
중학교 국사엔 한 페이지 분량 언급에 그쳐
현재 사용되고 있는 역사 교과서들은 4·19를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 한겨레 > 가 서울 중앙고 3학년 81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인식조사 결과를 보면, 이들은 주로 중학교(59명·72.8%)와 고등학교(65명·80.2%) 수업을 통해 4·19에 관한 지식을 얻는 것으로 나타났다. 책(26명·32%)이나 어른들 얘기(45명·55.5%)의 비율은 예상보다 상대적으로 낮았다. 10대들의 지식 형성에 역사 교육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는 뜻이다.
현행 국사 교육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모두 국정 교과서인 < 국사 > 를 중심에 놓고 있다. 단, 고등학교 2~3학년은 정부의 교과서 지침에 맞게 출판사들이 자유롭게 저술하는 < 한국 근·현대사 > (선택과목)가 따로 마련돼 있다.
중학교 < 국사 > 는 소단원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은 왜 일어났는가'에서 4·19를 다룬다. 서술 분량은 1쪽 정도로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독재와 3·15 부정선거에 대응해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학생과 시민들이 일으킨 것으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며 민주주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는 기술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고등학교 < 국사 > 는 < 한국 근·현대사 > 와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정부 수립에서 신군부 집권까지를 다룬 '대한민국의 성립과 발전'이란 꼭지에서 "국민의 분노가 전국적으로 터지면서 4·19 혁명이 일어났다"는 짧은 언급에 그치고 있다.
그 대신 금성출판사 등 6개 출판사의 < 한국 근·현대사 > 는 소단원 '민주주의의 시련과 발전'에서 4·19를 평균 11.6쪽에 걸쳐 상세히 다룬다. 이들 교과서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화→3·15 부정선거→4·19 혁명→민주당 정권의 등장' 과정을 사진과 당시에 발표된 글을 첨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금성출판사와 미래엔컬쳐그룹(구 대한교과서)은 4·19를 '미완의 혁명'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서울의 고등학교에서 < 한국 근·현대사 > 를 가르치는 한 교사는 "일부 교과서는 그 뒤에 등장한 민주당 정권이 부패하고 4·19를 제대로 계승하지 못했다고 서술해 5·16 쿠데타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학생들이 4·19를 배울 기회가 크게 줄어들 전망이다. 교육인적자원부가 지난해 12월, 아직 시행도 안 된 '2007년 개정교육과정'을 개정하면서 역사 관련 수업을 대폭 줄였기 때문이다. 2011년 시행 예정이었던 '2007 개정교육과정'은 중학교 2~3학년생들에게 전근대 한국사와 세계사를 합친 < 역사 > , 고등학생들에게는 1학년 때 근현대 한국사와 세계사를 합친 < 역사 > 를 가르칠 계획이었다. 2~3학년 선택과목으로는 < 한국 근·현대사 > 를 폐지하고 < 한국 문화사 > 등을 마련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교육과학기술부는 이 계획을 시행해보지도 않고, 1학년 필수과목이던 < 역사 > 를 선택과목 < 한국사 > 로 바꾸고 선택과목 < 한국 문화사 > 는 없애는 내용을 뼈대로 한 '2009년 개정교육과정'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고등학교 1학년 때 < 한국사 > 를 선택하지 않는 학생은 중학교 2~3학년 < 역사 > 외에는 4·19를 배울 기회가 사라진다.
오세운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용산고)은 "중학교 < 역사 > 의 경우, 현대사가 마지막 부분에 있고 < 한국사 > 가 선택이 되면서 4·19 혁명과 같은 민주화 운동을 배울 기회가 적다. 더구나 대학 입시 위주의 수업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민주화 운동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라고 지적했다. 난곡중에서 < 국사 > 를 가르치는 유필조 교사는 "안 그래도 4·19 관련 내용은 교과서 끝에 나오기 때문에 학년말과 겹쳐 잘 가르치지 않았다"며 "지금도 서술이 너무 딱딱하고 짧은데 앞으로는 정말 문제"라고 말했다.
'한국사' 선택 전환…못배운 채 졸업할수도
중학교 국사엔 한 페이지 분량 언급에 그쳐
현재 사용되고 있는 역사 교과서들은 4·19를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현행 국사 교육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모두 국정 교과서인 < 국사 > 를 중심에 놓고 있다. 단, 고등학교 2~3학년은 정부의 교과서 지침에 맞게 출판사들이 자유롭게 저술하는 < 한국 근·현대사 > (선택과목)가 따로 마련돼 있다.
중학교 < 국사 > 는 소단원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은 왜 일어났는가'에서 4·19를 다룬다. 서술 분량은 1쪽 정도로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독재와 3·15 부정선거에 대응해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학생과 시민들이 일으킨 것으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며 민주주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는 기술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고등학교 < 국사 > 는 < 한국 근·현대사 > 와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정부 수립에서 신군부 집권까지를 다룬 '대한민국의 성립과 발전'이란 꼭지에서 "국민의 분노가 전국적으로 터지면서 4·19 혁명이 일어났다"는 짧은 언급에 그치고 있다.
그 대신 금성출판사 등 6개 출판사의 < 한국 근·현대사 > 는 소단원 '민주주의의 시련과 발전'에서 4·19를 평균 11.6쪽에 걸쳐 상세히 다룬다. 이들 교과서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화→3·15 부정선거→4·19 혁명→민주당 정권의 등장' 과정을 사진과 당시에 발표된 글을 첨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금성출판사와 미래엔컬쳐그룹(구 대한교과서)은 4·19를 '미완의 혁명'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서울의 고등학교에서 < 한국 근·현대사 > 를 가르치는 한 교사는 "일부 교과서는 그 뒤에 등장한 민주당 정권이 부패하고 4·19를 제대로 계승하지 못했다고 서술해 5·16 쿠데타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학생들이 4·19를 배울 기회가 크게 줄어들 전망이다. 교육인적자원부가 지난해 12월, 아직 시행도 안 된 '2007년 개정교육과정'을 개정하면서 역사 관련 수업을 대폭 줄였기 때문이다. 2011년 시행 예정이었던 '2007 개정교육과정'은 중학교 2~3학년생들에게 전근대 한국사와 세계사를 합친 < 역사 > , 고등학생들에게는 1학년 때 근현대 한국사와 세계사를 합친 < 역사 > 를 가르칠 계획이었다. 2~3학년 선택과목으로는 < 한국 근·현대사 > 를 폐지하고 < 한국 문화사 > 등을 마련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교육과학기술부는 이 계획을 시행해보지도 않고, 1학년 필수과목이던 < 역사 > 를 선택과목 < 한국사 > 로 바꾸고 선택과목 < 한국 문화사 > 는 없애는 내용을 뼈대로 한 '2009년 개정교육과정'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고등학교 1학년 때 < 한국사 > 를 선택하지 않는 학생은 중학교 2~3학년 < 역사 > 외에는 4·19를 배울 기회가 사라진다.
오세운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용산고)은 "중학교 < 역사 > 의 경우, 현대사가 마지막 부분에 있고 < 한국사 > 가 선택이 되면서 4·19 혁명과 같은 민주화 운동을 배울 기회가 적다. 더구나 대학 입시 위주의 수업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민주화 운동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라고 지적했다. 난곡중에서 < 국사 > 를 가르치는 유필조 교사는 "안 그래도 4·19 관련 내용은 교과서 끝에 나오기 때문에 학년말과 겹쳐 잘 가르치지 않았다"며 "지금도 서술이 너무 딱딱하고 짧은데 앞으로는 정말 문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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