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있는 뿌리깊은 이야기
무용수 본문
뉴욕 윈저 호텔.
그곳에는 유명한 발레리너가 묵고 있었슴다.
근데 공연을 하루 앞둔 어느 날 호텔 화재가 발생해서
공연에 입고 나갈 의상이 몽땅 타 버린검다.
새로 의상을 준비할 시간도 엄꼬.....공연을 취소 할 수도 엄꼬.....
그녀는 할 수 없이 타다 남은 창문 커튼을 몸에 두르고 무대에 섰슴다.
맨발에.....걸친듯 만듯한 커튼 조각......흐느적거리는가 하면......격정적인 몸 놀림......
관중들은 전보다 더 열광했고 더 뜨거운 환호성을 보냈슴다.
대충 짐작하셨겠지만 이 뇨자가 바로 이사도라 던컨(1878~1927)임다.
격식, 인습, 규격을 거부한 현대무용의 창시자로서
모던댄스를 새로운 예술의 한 장르로 인정 받게 한 주인공임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평가는 호평과 악평이 극을 달렸슴다.
"야야....저런게 무슨 춤이냐....저거 강남 나이트에 가면 허벌나게 널렸다.
불쇼, 물쇼, 뱀쇼, 채찍쇼....온갖 라이브 생쑈가 널럴하게 있다"
"야야...보수주의자들아......잘 바바.....저건 춤의 혁명이야.......
너네덜은 이박사 노래, 싸이의 이잡는 춤도 같잖게 보는 넘덜이지?"
발레화를 벗어 던지고 언제나 맨발로 섰던 이사도라....
속살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실루엣차림으로
때로는 갈기갈기 찢겨진 옷으로
때로는 길이가 다른 천을 몸에 걸치고 춤을 춘 그녀.
그녀는 일단 무대에 섰다 하면 작두에 올라 탄 무녀처럼
연혼과 육체가 분리된 듯한 광기어린 춤을 추었담다.
그 몰입의 강도가 얼마나 높았던지 막이 내릴 즈음에는
정신을 잃고 혼절할 때가 많았다고 함다.
신들린 무당처럼 육체를 감각의 흐름에 내 맡겼던 그녀는
남자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결코 머뭇거림 없는
"감각의 제국" 그 자체, 격정적인 성욕의 화신이었으며,
결코 한 남자에게 만족 할 수 없다고 외쳤던 뜨거운 뇨자였슴다.
성의 충동이 일어나면 상대를 가리지않고 덤벼드는 그녀의 첫 상대는
헝가리 출신 미남배우 "오스카 베레기"였슴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로미오 역을 맡았던 그넘과
공연기간 내내 밤만 되면 도나우 강변의 모텔촌에 가서 몸을 태웠슴다.
남자에 맛 들인 그녀....이번엔 무대장치가인 "크레이그"를 후림다.
"크레이그"의 테크닉이 얼마나 기절초풍할정도였는지
그녀는 연습 빼 먹는 것은 물론, 공연 당일 행방을 감추기도 했슴다.
그녀의 매니저가 죽을뚱 살뚱 그녀 있는곳을 찾아보면
어김없이 "크레이그"와의 숨가쁜 정사로 할딱이고 있었슴다.
재봉틀 왕 "싱거"의 세째아들인 "아이작 싱거"와의 사랑...
재벌 2세인 탓인지 이넘과의 사랑은 7년이나 지속됐슴다.
두 사람의 사이에 아들 딸 하나 씩 두었는데
언덕에 주차해둔 그녀의 차가 뒤로 미끌어져 세느강에 빠지면서
차안에 타고있던 아이들이 익사해 버린 사건을 계기로 헤어짐다.
운명의 장난인지....훗날 이사도라 그녀도 자동차 사고로 죽죠.
실의와 충격에 빠진 그녀는 5년 동안 홀로 외롭게 지내다가
러시아를 여행하던중 러시아 혁명의 계관시인 "세르게이 예세닌"을 만남다.
무려 17살이나 영계인 "예세닌"과의 사랑에 흠뻑 빠진 그녀는
그때까지의 독신주의를 포기하고 "예세닌"과 결혼하고,
고국인 미국에 돌아와 성대한 공연을 열었슴다.
"예세닌"은 러시아어로 시를 낭송하고
그녀는 으례 그렇듯 반나의 몸으로 춤을 추었슴다.
그런데 그녀가 빨간 스카프를 흔들어 댄게 관객을 화나게 했슴다.
빨간색은 볼세비키 혁명의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임다.
관객들이나 비평가들은 신랄한 혹평을 해대며
"알몸땡이로 춤추는 볼세비키의 닳고 닳은 미친년"이라고 비난했슴다.
유별나게도 빨간색을 좋아했던 그녀의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그녀는 순회공연을 가는 곳마다 비난속에 실패만 했슴다.
그러게 우리의 똑똑한 "임수경"도 북한에 갔을 때
북한 어린애들이 빨간 마후라를 목에 매주려 하자 정중히 거절 했다자너......
허기사 그녀도 할말이 많을지도 모름다.
왜냐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사도라는
자신이 가장 좋아한 빨간 숄을 몸에 두르고 '라 마르세이즈'를 추어
미국의 참전을 호소했던 유명한 일화가 있었기 때문이죠.
"그때나 지금이나 똑 같은 빨간색인데 ......왜 지랄들이냐?
그때는 애국자라고 추켜세우드만 지금은 매국노라고 돌을 던져?
너네덜 혹시 매카시 할애비라도 되는겨?"
이렇게 뎀비고 싶었겠지만
이미 냉담하게 돌아서버린 관객들한테 그 무슨 소용있겠슴가?
그녀는 빈털털이로 다시 유럽으로 떠남다.
유럽 각국을 순회 공연하면서 가는 곳마다 애인을 만들었고
싫증나면 냅다 차버린 놈씨덜만 무려 30 여명.....
그녀의 무용이 날로 열정과 신비를 더해 예술로 승화됨에 비례하여
그녀의 남성편력 역시 국제적인 스캔들로 언론을 장식했었슴다.
그녀의 최후는 너무나 운명적임다.
공연장으로 가기 위해 차에 올라 타면서
빨간 스커프를 길게 목에 두른 그녀는 소리 쳤슴다.
"기자 여러분....저는 영광을 향해 출발합니다...안녕"
차가 달리기 시작했을 때 스카프의 자락이 뒷바퀴에 감기면서
그녀의 목뼈가 순식간에 부러지며 사망하게 됨다.
자신의 분신처럼 애용했던 빨간색 스커프에 의해......
그녀의 두아이를 죽게 했던 자동차 사고에 의해......
맨발의 이사도라와 비슷한 시기에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울나라의 무용가가 있다는 사실을 아심까?
얼마전 부터 재조명을 받으며 우리에게 알려진 "최승희"임다.
조선의 빛나는 별 ....최승희(1911~ 생사불명)는
울나라의 전통무용을 재창작하여 세계무대에 선 보인 천재 무용수로
그녀가 없었더라면 울나라의 전통무용도 없었을 것이라고 함다.
부채춤, 장고춤, 보살춤,칼춤....이게다 그녀가 재 창조 한 것임다.
그녀가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잠깐 살펴 보겠슴다.
20대 어린나이에 이미 일본에서 그녀의 자서전이 간행되고,
그녀의 춤인생을 그린 영화 "반도의 무희"가
장장 4년 동안 상연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으며,
서른이 되기 전 유럽의 저명 국제무용 콩쿠르에 심사위원으로 초대받슴다.
미국 카네기홀을 시작으로 미국 주요도시를 순회 공연하며,
"동양의 신비"를 뚜렷히 각인시켜 코쟁이덜을 열광케 했슴다.
울 나라 이름 값하는 시덥잖은 카수덜이 뻑하면
"한국인 최초의 카네기 홀 공연".....어쩌구 하며 설레발 치는데
그거이 다 웃기는 얘기임다.......최승희가 최초임다.
세계 초일류 무용수인 마사 그레이엄과 뉴욕에서 합동공연을 했고,
일본 무용수가 평생 한번 서보는게 소원이라는 도쿄의 제국극장에서는
17일 연속 공연이라는 초유의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슴다.
이런 인기는 세계 각국에 널리 알려져
1937년부터 3년여에 걸쳐 미국과 유럽, 중남미를 순회공연하면서,
현지 언론으로 부터 "동양의 진주" "조선무용을 잠에서 깨워 세계에 떨친 주인공"
"그녀에게는 일본의 색, 중국의 몸짓과 한국의 선이 함께 흐르고 있다" 등등
극찬을 받으며 울나라 무용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과시했슴다.
그러나 그녀의 인생은 남편 "안막"의 권유로 월북하면서 크게 바뀜다.
한동안은 북한무용의 중흥에 큰 역할을 했다고 알려진 그녀......
60년대 후반에 숙청당해 사라진 것을 끝으로
남쪽에서도 북쪽에서도 그 이름을 거론하는 자체가 금기시 되다가
얼마전부터 그녀의 활동상이 재조명 받고 있는거죠.
일제시대, 남북분단, 군사정권......이 3대 악조건은
울나라 예술인들을 무덤까지 따라가 괴롭힌 저주받은 유물임다.
그곳에는 유명한 발레리너가 묵고 있었슴다.
근데 공연을 하루 앞둔 어느 날 호텔 화재가 발생해서
공연에 입고 나갈 의상이 몽땅 타 버린검다.
새로 의상을 준비할 시간도 엄꼬.....공연을 취소 할 수도 엄꼬.....
그녀는 할 수 없이 타다 남은 창문 커튼을 몸에 두르고 무대에 섰슴다.
맨발에.....걸친듯 만듯한 커튼 조각......흐느적거리는가 하면......격정적인 몸 놀림......
관중들은 전보다 더 열광했고 더 뜨거운 환호성을 보냈슴다.
대충 짐작하셨겠지만 이 뇨자가 바로 이사도라 던컨(1878~1927)임다.
격식, 인습, 규격을 거부한 현대무용의 창시자로서
모던댄스를 새로운 예술의 한 장르로 인정 받게 한 주인공임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평가는 호평과 악평이 극을 달렸슴다.
"야야....저런게 무슨 춤이냐....저거 강남 나이트에 가면 허벌나게 널렸다.
불쇼, 물쇼, 뱀쇼, 채찍쇼....온갖 라이브 생쑈가 널럴하게 있다"
"야야...보수주의자들아......잘 바바.....저건 춤의 혁명이야.......
너네덜은 이박사 노래, 싸이의 이잡는 춤도 같잖게 보는 넘덜이지?"
발레화를 벗어 던지고 언제나 맨발로 섰던 이사도라....
속살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실루엣차림으로
때로는 갈기갈기 찢겨진 옷으로
때로는 길이가 다른 천을 몸에 걸치고 춤을 춘 그녀.
그녀는 일단 무대에 섰다 하면 작두에 올라 탄 무녀처럼
연혼과 육체가 분리된 듯한 광기어린 춤을 추었담다.
그 몰입의 강도가 얼마나 높았던지 막이 내릴 즈음에는
정신을 잃고 혼절할 때가 많았다고 함다.
신들린 무당처럼 육체를 감각의 흐름에 내 맡겼던 그녀는
남자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결코 머뭇거림 없는
"감각의 제국" 그 자체, 격정적인 성욕의 화신이었으며,
결코 한 남자에게 만족 할 수 없다고 외쳤던 뜨거운 뇨자였슴다.
성의 충동이 일어나면 상대를 가리지않고 덤벼드는 그녀의 첫 상대는
헝가리 출신 미남배우 "오스카 베레기"였슴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로미오 역을 맡았던 그넘과
공연기간 내내 밤만 되면 도나우 강변의 모텔촌에 가서 몸을 태웠슴다.
남자에 맛 들인 그녀....이번엔 무대장치가인 "크레이그"를 후림다.
"크레이그"의 테크닉이 얼마나 기절초풍할정도였는지
그녀는 연습 빼 먹는 것은 물론, 공연 당일 행방을 감추기도 했슴다.
그녀의 매니저가 죽을뚱 살뚱 그녀 있는곳을 찾아보면
어김없이 "크레이그"와의 숨가쁜 정사로 할딱이고 있었슴다.
재봉틀 왕 "싱거"의 세째아들인 "아이작 싱거"와의 사랑...
재벌 2세인 탓인지 이넘과의 사랑은 7년이나 지속됐슴다.
두 사람의 사이에 아들 딸 하나 씩 두었는데
언덕에 주차해둔 그녀의 차가 뒤로 미끌어져 세느강에 빠지면서
차안에 타고있던 아이들이 익사해 버린 사건을 계기로 헤어짐다.
운명의 장난인지....훗날 이사도라 그녀도 자동차 사고로 죽죠.
실의와 충격에 빠진 그녀는 5년 동안 홀로 외롭게 지내다가
러시아를 여행하던중 러시아 혁명의 계관시인 "세르게이 예세닌"을 만남다.
무려 17살이나 영계인 "예세닌"과의 사랑에 흠뻑 빠진 그녀는
그때까지의 독신주의를 포기하고 "예세닌"과 결혼하고,
고국인 미국에 돌아와 성대한 공연을 열었슴다.
"예세닌"은 러시아어로 시를 낭송하고
그녀는 으례 그렇듯 반나의 몸으로 춤을 추었슴다.
그런데 그녀가 빨간 스카프를 흔들어 댄게 관객을 화나게 했슴다.
빨간색은 볼세비키 혁명의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임다.
관객들이나 비평가들은 신랄한 혹평을 해대며
"알몸땡이로 춤추는 볼세비키의 닳고 닳은 미친년"이라고 비난했슴다.
유별나게도 빨간색을 좋아했던 그녀의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그녀는 순회공연을 가는 곳마다 비난속에 실패만 했슴다.
그러게 우리의 똑똑한 "임수경"도 북한에 갔을 때
북한 어린애들이 빨간 마후라를 목에 매주려 하자 정중히 거절 했다자너......
허기사 그녀도 할말이 많을지도 모름다.
왜냐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사도라는
자신이 가장 좋아한 빨간 숄을 몸에 두르고 '라 마르세이즈'를 추어
미국의 참전을 호소했던 유명한 일화가 있었기 때문이죠.
"그때나 지금이나 똑 같은 빨간색인데 ......왜 지랄들이냐?
그때는 애국자라고 추켜세우드만 지금은 매국노라고 돌을 던져?
너네덜 혹시 매카시 할애비라도 되는겨?"
이렇게 뎀비고 싶었겠지만
이미 냉담하게 돌아서버린 관객들한테 그 무슨 소용있겠슴가?
그녀는 빈털털이로 다시 유럽으로 떠남다.
유럽 각국을 순회 공연하면서 가는 곳마다 애인을 만들었고
싫증나면 냅다 차버린 놈씨덜만 무려 30 여명.....
그녀의 무용이 날로 열정과 신비를 더해 예술로 승화됨에 비례하여
그녀의 남성편력 역시 국제적인 스캔들로 언론을 장식했었슴다.
그녀의 최후는 너무나 운명적임다.
공연장으로 가기 위해 차에 올라 타면서
빨간 스커프를 길게 목에 두른 그녀는 소리 쳤슴다.
"기자 여러분....저는 영광을 향해 출발합니다...안녕"
차가 달리기 시작했을 때 스카프의 자락이 뒷바퀴에 감기면서
그녀의 목뼈가 순식간에 부러지며 사망하게 됨다.
자신의 분신처럼 애용했던 빨간색 스커프에 의해......
그녀의 두아이를 죽게 했던 자동차 사고에 의해......
맨발의 이사도라와 비슷한 시기에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울나라의 무용가가 있다는 사실을 아심까?
얼마전 부터 재조명을 받으며 우리에게 알려진 "최승희"임다.
조선의 빛나는 별 ....최승희(1911~ 생사불명)는
울나라의 전통무용을 재창작하여 세계무대에 선 보인 천재 무용수로
그녀가 없었더라면 울나라의 전통무용도 없었을 것이라고 함다.
부채춤, 장고춤, 보살춤,칼춤....이게다 그녀가 재 창조 한 것임다.
그녀가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잠깐 살펴 보겠슴다.
20대 어린나이에 이미 일본에서 그녀의 자서전이 간행되고,
그녀의 춤인생을 그린 영화 "반도의 무희"가
장장 4년 동안 상연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으며,
서른이 되기 전 유럽의 저명 국제무용 콩쿠르에 심사위원으로 초대받슴다.
미국 카네기홀을 시작으로 미국 주요도시를 순회 공연하며,
"동양의 신비"를 뚜렷히 각인시켜 코쟁이덜을 열광케 했슴다.
울 나라 이름 값하는 시덥잖은 카수덜이 뻑하면
"한국인 최초의 카네기 홀 공연".....어쩌구 하며 설레발 치는데
그거이 다 웃기는 얘기임다.......최승희가 최초임다.
세계 초일류 무용수인 마사 그레이엄과 뉴욕에서 합동공연을 했고,
일본 무용수가 평생 한번 서보는게 소원이라는 도쿄의 제국극장에서는
17일 연속 공연이라는 초유의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슴다.
이런 인기는 세계 각국에 널리 알려져
1937년부터 3년여에 걸쳐 미국과 유럽, 중남미를 순회공연하면서,
현지 언론으로 부터 "동양의 진주" "조선무용을 잠에서 깨워 세계에 떨친 주인공"
"그녀에게는 일본의 색, 중국의 몸짓과 한국의 선이 함께 흐르고 있다" 등등
극찬을 받으며 울나라 무용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과시했슴다.
그러나 그녀의 인생은 남편 "안막"의 권유로 월북하면서 크게 바뀜다.
한동안은 북한무용의 중흥에 큰 역할을 했다고 알려진 그녀......
60년대 후반에 숙청당해 사라진 것을 끝으로
남쪽에서도 북쪽에서도 그 이름을 거론하는 자체가 금기시 되다가
얼마전부터 그녀의 활동상이 재조명 받고 있는거죠.
일제시대, 남북분단, 군사정권......이 3대 악조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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