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있는 뿌리깊은 이야기
장옥정 본문
장희빈, 본명 장옥정은 조사석 대감 (1632~1693년숙종 때 중신으로 대왕대비의 조카)과 동평군 (대왕대비의 조카)에 의해 궁녀가 되었고 숙종과 눈이 마주치면서 숙종의 관심을 받게 되며 나중에는 숙종의 승은을 받는다. 하지만 왕대비(숙종의 어머니)에 의해 쫓겨나게 되지만 대왕대비가 숭선군(동평군의 아버지)에 집에 있게 된다.
그리고 왕대비가 돌아가셨을 때 중전의 허락을 받아 숙원으로 다시 궁에 들어가게 되면서 숙종과 가깝게 된다.하지만 왕이 될 아이가 태어나지 않자 대왕대비 전교로 간택령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1686년 숙종 12년에 영의정 (김수항)의 종손녀가 후궁으로 간택되었다. 김수항의 종손녀는 귀인(조선시대 종 1품 내명부의 봉작) 으로 봉작되어 '김귀인'으로 불리어졌고 당시 숙종은 온통 장숙원에게 마음이 가 있어 김귀인에게는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리고 장숙원은 중전의 궁녀들이 숙종의 출입을 빤히 내다보고 중전에게 고하고 있다는 원인으로 자신의 처소를 옮겨달라고 해 숙종은 내수사 별좌(임금의 사유재산을 맡아서 관리하는 종5품 관직)를 시켜 밤에 처소를 짓게 한다. 이 별당짓기가 장옥정이란 이름 석자를 세상에 알리게 된다.
그러나 부교리이징명의 밤중에 별당을 짓는 것이 부당하고 장숙원을 쫓아내고 상소를 올려 삭탈관직(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명부에서 이름을 빼는 것)한 되 옥에 가두게 하라고 도승지와 부승지에게 말했으나 그 둘도 잔소리를 했다고 옥에 가두었다. 또 이이명, 서종태, 김중길도 장숙원을 쫓아내라고 말해 하옥당하고 김수항과 김수홍도 숙원을 내쫓으라고 했다. 또 숙종은 내수사 별좌에게 별당을 대낮에 당당하게 지으라고하고 도승지와 부승지가 감옥에 갔으니 '신완'을 도승지로 '권시경'을 부승지로 삼으라고 했다.
또 동평군을 혜민서 제조로 제수하고 조사석을 우의정에 임명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1688년 (숙종 14년) 겨울에 숙원이 왕자를 생산하여 소의로 올라갔다. 중전은 아기의 장수를 비는 의미에서 선물한 여모를 소의는 그것을 오해해 건양문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무너져가는 서인파를 울분하며 지켜보던 젊은 유생이 마음대로 궐내를 출입하는 옥정 어머니가 탄 옥교를 불태우고 하인들을 두들겨 팬 것이었다. 숙종은 이익수를 사형케했다.
그리고 한여름이 무르익었던 8월 (1688년 숙종 14년) 대왕대비 조씨(장렬왕후)는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689년 기사년 1월 숙종은 중신과 백관을 한자리에 불렀다. 숙종은 원자로 봉하려 하는데 이조판서 (남용익)가 중전이 왕자를 낳으면 어떻게 하냐고 하자 숙종은 남용익을 죄 주어 쫓아내라고 한다. 또 예조판서에게 장소의를 빈으로 높이고 왕자를 원자로 봉하라고 하고 희빈 장씨 아버지에서 증조할아버지까지 3대를 영의정에 봉할 것이며, 왕실의 경사쯤에 죄수들을 풀어주고 쌀과 피륙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그러나 김수홍은 숙종이 혼자 처리했다고 말해 숙종이 김수홍을 파직시켰다. 이 때 숙종은 3정승 등 많은 서인파 신하들을 남이파로 바꾸게 된다.
그렇게되어 송시열 (우암으로 서인파에 우두머리이다) 상소를 올려 숙종에게 삭탈관직당하고 쫓겨났다. 송시열이 벼슬에서 떨어지자 기회를 보아오던 남인파 중진인 이항이 송시열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린 것을 시작으로 남인들은 일제히 송시열을 탄핵하는 상소를 꼬리를 물고 올리자 숙종은 송시열을 귀양보내 위리 안치 시켰다. 우암 송시열은 끝내 사약을 받게 되지만 죽은지 5년 후 다시 숙종에 의해 관작을 받게 된다.
그리고 장희빈은 중전이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고 숙종을 속였다. 1689년 기사년 4월 23일 중전 인현왕후의 생일이다. 그리고 숙종은 김수항의 종손녀 김귀인이 거짓 소문을 만들어 민심을 소란케 했다고 쫓겨나고 감수항에게는 사약이 내려졌다. 또 중전은 김귀인과 한덩어리가 되어 장희빈을 질투하였다고 중전을 페위시키라고 한다. 그것을 반대해 말한 영의정 (권대웅)은 파직되고 서인파 남인파 할 것 없이 페위 반대를 벌떼처럼 일어나 한목소리 냈다.
숙종은 평소 아끼던 신하 응교(홍문관 종 4품 벼슬) 박태보가상소에 서명한 80여 명의 서인들의 대표에 나서자 상감이 집적 죄를 물었다. 박태보는 모진 고문에도 충절을 꺾지 않자 진도로 귀양을 보냈으나 출발 하자마자 노량진에서 죽게 된다. 남은 대부분의 서인파도 귀양을 가거나 파직 당하니 이를 두고 기사환국이라고 했다. 1690년 숙종 16냔 6월 7일 드디어 세자 책봉이 선포되고 장희빈은 10월에 정식 왕비로 책봉되고 장희재가 포도대장 겸 어영대장 겸이 �고 장희빈의 어머니는 파산부 부인이 �다. 장중전 아니 장옥정의 시대는 그렇게 시작됐다.
페비 민씨는 안국동 집에서 궁녀와 함께 일체 바깥 출입 없이 살고 있었다. 한분 오빠와 전 좌의정이었던 삼촌 등 일가친척 모두 귀양을 가고 오직 애오개 집에서 어머님이 나르시는 수라를 받으며 겨우 겨우 살아온지 어언 4년 그런데 아이들이 만든 장희빈을 장다리 페비 민씨를 미나리로 빗댄 동요가 만들어졌다. 그 때 숙종은 중전을 페위시킨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어느날 밤 숙종은 산책길에 화살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숙종이 이상히 생각해 살펴보니 눈이 먼 무당이 벽에 붙여 놓은 페비의 그림에 저주를 퍼부으며 화살을 쏘는 것을 보고 당장 포박해 문초한 겨로가 중전이 시켜서 한 일이란 사실을 알게 되지만 그 때는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는 일인데다 모든 것이 숙종 자신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로 자책하여 무당을 풀어 주었던 사건이 있었다.
그 때 숙종은 '최'가라는 무수리 거처에 자주 드셨다. 그 무수리는 페비를 모셨던 무수리인데 몇달 전 페비의 생일날 자신의 거처 벽에다 페비가 쓰던 의대를 걸어 놓고 상까지 차려 페비를 그리워하며 울다 때 마침 지나시던 상감의 눈에 뛴 것이 인연이 되었다. 그래서 장중전은 무수리를 마구 망가뜨린 모습을 숙종이 보게 되 숙종에게 완전 외면을 받게 된다. 그리고 무수리는 종 3품인 숙용이 되고 아이를 가진다. 숙용은 왕자를 낳ㄴ게 되며 후에 왕자는 조선조 21대 임금인 영조가 된다.
그리고 숙종은 유생 김인 등이 쓴 반역 고발장을 보았다. 그 내용은 영의정 권대운 좌의정 목내선 우의정 민암 총융사 장희재와 동평군이 역적모의를 하였고 장희재는 최숙용을 독살하기 위해 무감을 황금으로 매수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숙종은 역적모의를 한 자들의 벼슬을 떼어버리고 하옥시킨다. 이 건이 1694년 숙종 20년 3월에 있었던 갑술환국 남인파의 대다수가 하옥 되거나 귀양을 가고 대신 많은 서인파가 다시 등용되는 사건이다. 또 장중전은 희빈이 되거 페비가 다시 복위 �다. 이 일은 갑술환국이 있던 다음 달인 3월의 일이다. 페비는 궁으로 둘어오는 것을 거절했으나 숙종의 거듭되는 간절한 청에 7번을 거절하다 궁으로 들어가니 온백성들이 기뻐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1699년 숙종 25년 민중전의 나이 32세때 몸에 종기가 나는 병을 2년 8개월 동안 앓다가 숙종의 극진한 정성에도 불구하고 끝내 1701년 8월에 죽게 된다. 그리고 숙종은 장희빈이 중전을 저주한 것을 알고 장희빈,장희재에게 사약을 내리고 올케와 그 일당을 그 자리에서 목을 베었다.
그리고 1701년 숙종 27년 10월에 숙종은 후궁이 중전이 되지 못하게 되는 법을 만들었다.
그리고 왕대비가 돌아가셨을 때 중전의 허락을 받아 숙원으로 다시 궁에 들어가게 되면서 숙종과 가깝게 된다.하지만 왕이 될 아이가 태어나지 않자 대왕대비 전교로 간택령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1686년 숙종 12년에 영의정 (김수항)의 종손녀가 후궁으로 간택되었다. 김수항의 종손녀는 귀인(조선시대 종 1품 내명부의 봉작) 으로 봉작되어 '김귀인'으로 불리어졌고 당시 숙종은 온통 장숙원에게 마음이 가 있어 김귀인에게는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리고 장숙원은 중전의 궁녀들이 숙종의 출입을 빤히 내다보고 중전에게 고하고 있다는 원인으로 자신의 처소를 옮겨달라고 해 숙종은 내수사 별좌(임금의 사유재산을 맡아서 관리하는 종5품 관직)를 시켜 밤에 처소를 짓게 한다. 이 별당짓기가 장옥정이란 이름 석자를 세상에 알리게 된다.
그러나 부교리이징명의 밤중에 별당을 짓는 것이 부당하고 장숙원을 쫓아내고 상소를 올려 삭탈관직(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명부에서 이름을 빼는 것)한 되 옥에 가두게 하라고 도승지와 부승지에게 말했으나 그 둘도 잔소리를 했다고 옥에 가두었다. 또 이이명, 서종태, 김중길도 장숙원을 쫓아내라고 말해 하옥당하고 김수항과 김수홍도 숙원을 내쫓으라고 했다. 또 숙종은 내수사 별좌에게 별당을 대낮에 당당하게 지으라고하고 도승지와 부승지가 감옥에 갔으니 '신완'을 도승지로 '권시경'을 부승지로 삼으라고 했다.
또 동평군을 혜민서 제조로 제수하고 조사석을 우의정에 임명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1688년 (숙종 14년) 겨울에 숙원이 왕자를 생산하여 소의로 올라갔다. 중전은 아기의 장수를 비는 의미에서 선물한 여모를 소의는 그것을 오해해 건양문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무너져가는 서인파를 울분하며 지켜보던 젊은 유생이 마음대로 궐내를 출입하는 옥정 어머니가 탄 옥교를 불태우고 하인들을 두들겨 팬 것이었다. 숙종은 이익수를 사형케했다.
그리고 한여름이 무르익었던 8월 (1688년 숙종 14년) 대왕대비 조씨(장렬왕후)는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689년 기사년 1월 숙종은 중신과 백관을 한자리에 불렀다. 숙종은 원자로 봉하려 하는데 이조판서 (남용익)가 중전이 왕자를 낳으면 어떻게 하냐고 하자 숙종은 남용익을 죄 주어 쫓아내라고 한다. 또 예조판서에게 장소의를 빈으로 높이고 왕자를 원자로 봉하라고 하고 희빈 장씨 아버지에서 증조할아버지까지 3대를 영의정에 봉할 것이며, 왕실의 경사쯤에 죄수들을 풀어주고 쌀과 피륙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그러나 김수홍은 숙종이 혼자 처리했다고 말해 숙종이 김수홍을 파직시켰다. 이 때 숙종은 3정승 등 많은 서인파 신하들을 남이파로 바꾸게 된다.
그렇게되어 송시열 (우암으로 서인파에 우두머리이다) 상소를 올려 숙종에게 삭탈관직당하고 쫓겨났다. 송시열이 벼슬에서 떨어지자 기회를 보아오던 남인파 중진인 이항이 송시열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린 것을 시작으로 남인들은 일제히 송시열을 탄핵하는 상소를 꼬리를 물고 올리자 숙종은 송시열을 귀양보내 위리 안치 시켰다. 우암 송시열은 끝내 사약을 받게 되지만 죽은지 5년 후 다시 숙종에 의해 관작을 받게 된다.
그리고 장희빈은 중전이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고 숙종을 속였다. 1689년 기사년 4월 23일 중전 인현왕후의 생일이다. 그리고 숙종은 김수항의 종손녀 김귀인이 거짓 소문을 만들어 민심을 소란케 했다고 쫓겨나고 감수항에게는 사약이 내려졌다. 또 중전은 김귀인과 한덩어리가 되어 장희빈을 질투하였다고 중전을 페위시키라고 한다. 그것을 반대해 말한 영의정 (권대웅)은 파직되고 서인파 남인파 할 것 없이 페위 반대를 벌떼처럼 일어나 한목소리 냈다.
숙종은 평소 아끼던 신하 응교(홍문관 종 4품 벼슬) 박태보가상소에 서명한 80여 명의 서인들의 대표에 나서자 상감이 집적 죄를 물었다. 박태보는 모진 고문에도 충절을 꺾지 않자 진도로 귀양을 보냈으나 출발 하자마자 노량진에서 죽게 된다. 남은 대부분의 서인파도 귀양을 가거나 파직 당하니 이를 두고 기사환국이라고 했다. 1690년 숙종 16냔 6월 7일 드디어 세자 책봉이 선포되고 장희빈은 10월에 정식 왕비로 책봉되고 장희재가 포도대장 겸 어영대장 겸이 �고 장희빈의 어머니는 파산부 부인이 �다. 장중전 아니 장옥정의 시대는 그렇게 시작됐다.
페비 민씨는 안국동 집에서 궁녀와 함께 일체 바깥 출입 없이 살고 있었다. 한분 오빠와 전 좌의정이었던 삼촌 등 일가친척 모두 귀양을 가고 오직 애오개 집에서 어머님이 나르시는 수라를 받으며 겨우 겨우 살아온지 어언 4년 그런데 아이들이 만든 장희빈을 장다리 페비 민씨를 미나리로 빗댄 동요가 만들어졌다. 그 때 숙종은 중전을 페위시킨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어느날 밤 숙종은 산책길에 화살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숙종이 이상히 생각해 살펴보니 눈이 먼 무당이 벽에 붙여 놓은 페비의 그림에 저주를 퍼부으며 화살을 쏘는 것을 보고 당장 포박해 문초한 겨로가 중전이 시켜서 한 일이란 사실을 알게 되지만 그 때는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는 일인데다 모든 것이 숙종 자신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로 자책하여 무당을 풀어 주었던 사건이 있었다.
그 때 숙종은 '최'가라는 무수리 거처에 자주 드셨다. 그 무수리는 페비를 모셨던 무수리인데 몇달 전 페비의 생일날 자신의 거처 벽에다 페비가 쓰던 의대를 걸어 놓고 상까지 차려 페비를 그리워하며 울다 때 마침 지나시던 상감의 눈에 뛴 것이 인연이 되었다. 그래서 장중전은 무수리를 마구 망가뜨린 모습을 숙종이 보게 되 숙종에게 완전 외면을 받게 된다. 그리고 무수리는 종 3품인 숙용이 되고 아이를 가진다. 숙용은 왕자를 낳ㄴ게 되며 후에 왕자는 조선조 21대 임금인 영조가 된다.
그리고 숙종은 유생 김인 등이 쓴 반역 고발장을 보았다. 그 내용은 영의정 권대운 좌의정 목내선 우의정 민암 총융사 장희재와 동평군이 역적모의를 하였고 장희재는 최숙용을 독살하기 위해 무감을 황금으로 매수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숙종은 역적모의를 한 자들의 벼슬을 떼어버리고 하옥시킨다. 이 건이 1694년 숙종 20년 3월에 있었던 갑술환국 남인파의 대다수가 하옥 되거나 귀양을 가고 대신 많은 서인파가 다시 등용되는 사건이다. 또 장중전은 희빈이 되거 페비가 다시 복위 �다. 이 일은 갑술환국이 있던 다음 달인 3월의 일이다. 페비는 궁으로 둘어오는 것을 거절했으나 숙종의 거듭되는 간절한 청에 7번을 거절하다 궁으로 들어가니 온백성들이 기뻐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1699년 숙종 25년 민중전의 나이 32세때 몸에 종기가 나는 병을 2년 8개월 동안 앓다가 숙종의 극진한 정성에도 불구하고 끝내 1701년 8월에 죽게 된다. 그리고 숙종은 장희빈이 중전을 저주한 것을 알고 장희빈,장희재에게 사약을 내리고 올케와 그 일당을 그 자리에서 목을 베었다.
그리고 1701년 숙종 27년 10월에 숙종은 후궁이 중전이 되지 못하게 되는 법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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