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희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국제법적 의미 되새겨야"
(서울=연합뉴스) 강진욱 기자 = "안중근 의사 의거는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군대 마저 강제로 해산당한 피압박민족이 식민지 지배에 대항해 민족해방전쟁을 수행한 것으로 봐야 한다. 일제는 군 포로로 취급돼야 한다는 안 의사의 주장을 묵살하고 자기네 형법을 적용해 파렴치범으로 살인죄를 씌운 뒤 서둘러 사형을 집행했다. 일 제의 이런 처사가 법적으로 부당했음을 증명해야 한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운영위원이고 민족화해범협력국민협의회(민화협) 상임의 장을 맡고 있는 이장희 한국외국어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법학박사)는 25일 안 의 사 의거 100주년(10.26)을 맞아 정부와 언론, 시민단체들이 당시 사건을 여러 각도 에서 재조명하고 있지만 사건의 국제법적 의미에 대한 고찰이 부족하다며 이렇게 말 했다.
그는 특히 "최근 몇몇 일본 학자들이 안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의거를 테러리즘 으로 분류하려 하는 데 대해 좌시하고 있어서는 안된다"면서 "이는 그동안 안 의사 의 의거에 대한 국제법적 고찰이 부족했던 것도 한 원인"이라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기자에게 안중근 의사의 재판기록을 보여주며 안 의사가 일제 경찰 에 맞서 자신의 입장을 어떻게 주장했는지를 설명했다.
안 의사는 일제가 형법에 의거해 사형선고를 내린 지 이틀 뒤인 1910년 2월 17 일 일제 고등재판장 히라이시를 찾아가 "군인의 자격으로 이토를 처단했다"며 국제 법에 따라 재판을 받겠다고 밝혔다.
안 의사는 또 뤼순 지방재판소에서 재판을 받는 것은 한일협약에도 위반되는 것 이라고 지적하면서 "국제사회도 일본의 이런 처사를 비난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돼 있다.
안 의사는 "나는 개인 자격으로 남을 죽인 것이 아니다. 이는 대한국 의병 참모 중장의 의무로, 소임을 띠고 하얼빈에 이르러 전쟁을 일으켜 습격한 뒤 포로가 돼 이곳에 온 것이니 만국공법으로써 판결하는 것이 옳다"고 진술했다.
이 교수는 "일제와 대한제국 의병 간에는 국내외에 걸쳐 광범위한 교전이 계속 되고 있었고 의병장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교전자로 볼 수 있으므로 안 의사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제가 을사늑약(1905)으로 대한제 국의 외교권을 빼앗아가기는 했지만 여전히 국가가 존재하고 있었고 정부의 지시나 요구는 없었지만 전국 곳곳에서 자발적으로 의병이 들고 일어나 일제와 교전을 벌이 는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또 안 의사의 죄목이 살인죄라는 것도 당시 정세와 맞지 않는다고 지 적했다.
"의병 활동은 의거 2년 전인 1907년 6월 고종의 명으로 이준 열사와 이위종, 이 상설 선생 등 3명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돼 일제의 국권 침탈을 세계 만방에 알리려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국권을 수호하려는 행동이었다. 안 의사도 밝혔듯이 그가 이토에 대한 사사로운 감정에서 그를 저격한 것이 아니라 분명 국가와 민족을 위해 적(敵)의 수괴를 처단한 것이었다."
이토의 신분에 대해서도 그는 "일본 명치유신의 기틀을 닦고 초대총리 등 4차례 나 총리대신을 지냈고 대한제국의 통감을 지낸 인물로서 이토를 순수 민간인으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일본 쪽에서 안 의사 의거를 테러로 규정하려는 시도는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 이 교수의 주장이다.
"국제법상 테러라 함은 금전 등 사적인 이익을 목적으로 무고한 불특정다수를 살상하는 것인데 안 의사의 경우는 이토에게 총 세 발을 쏘아 쓰러뜨린 뒤 '대한제 국 만세'를 삼창함으로써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치적 목적을 만천하에 알리려 했다. "
이 교수는 "안 의사 의거는 1949년 제네바 국제인도협약의 1977년 제1추가의정 서 제1조 제4항의 국제적 무력충돌에 해당된다"면서 "일제의 식민지 강점에 대한 저 항행위로서 그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이어 러시아가 안 의사의 신병을 일본에 넘기지 않았더라면 안 의사 가 살인죄로 그렇게 빨리 처형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러시아 조차지인 하얼빈 역에서 사건이 벌어졌고 러시아 헌병들이 안 의사를 체 포했다면 마땅히 러시아가 재판권을 행사했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전 9시경 의거 직후 안 의사는 러시아 헌병에 체포돼 하얼빈 역사 지 하 유치장에 갇혔고 조사도 받았지만 당일 오후 10시 10분 일본 총영사관에 신병이 넘겨졌다.
이 교수는 당시 김재동이라는 조선인이 일본인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고 러시아 가 그의 신병을 일본에 넘겨준 선례가 있기는 하지만 안 의사의 의거는 정치적인 사 건이었고 안 의사 또한 정치범으로 취급됐어야 마땅한데도 서둘러 일제에 신병을 넘 긴 데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내막이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부분이 중요한데 아직 관련 사료를 찾지 못했다. 안창호, 이상설, 이위종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이 약 100년 전 뉴욕 항을 통해 미국에 입국했던 기록이 최근 발견됐듯이 안 의사 재판에 관한 기록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러일전쟁(1904∼190 5)에서 진 러시아가 일본과 다시 충돌하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작용했을 것이라는 게 다.
일제로 신병이 넘어간 이상 재판이 공정했을 리 없다. "당시 일본의 관선 변호 인조차도 일본 형법이 아닌 대한제국 헌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05년 을 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상실했지만 행정권까지 모두 상실한 것이 아니었다."
이 교수는 또 일제가 안 의사를 사형에 처하도록 뤼순법원에 지시를 내렸다면서 애초부터 결과를 정해놓고 형식상 재판 절차를 거쳤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재판부나 검사단의 구성, 변호인 선임, 촉박한 재판 일정, 일본인들로 만 구성된 통역 등 재판의 공정성을 저해하는 요소들이 수두룩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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