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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고전)

율곡 선생의 연인, 유지

AziMong 2007. 2. 24. 21:04
율곡 선생의 연인, 유지


안녕하세요. 저는 4백 년전에 뭇 남성의 가슴을 숯덩이로 만들던 황해도 황주(黃州) 기생, 유지(柳枝)라고 해요. 오늘은 저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을 얘기할래요.

저의 낭군은 율곡(栗谷)선생이어요. 스캔들을 폭로하려고 하냐고요. 노! 노라고요. 클린턴이 한 호텔 방에서 바지를 벗고 오랄 섹스를 요구했다며 ‘클린턴의 성기는 발기 때 뚜렷이 휘어진 모양이었다.’라고 성희롱 소송을 낸 폴라 존스같은 여자라고 저를 생각하면 곤란해요.

저와 율곡 선생과의 사랑은 생각만 해도 아름다워지는 그런 로맨스였어요. 뭐랄까. 서로의 기쁨과 슬픔도 그리고 한숨까지도 모두 받아들이며 보듬어 주는 것, 그래서 끝없이 뻗어간 철길처럼 평생토록 평행선으로 누워 서로를 갈망하는 미완성같은 사랑, 그리고 나의 전체를 주어도 돌아서면 샘물처럼 또 다시 그리워지는 그런 사랑이랄까요.

저는 우연히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한 율곡선생을 모시게 되었어요. 당시 선생의 나이는 건장한 39살의 청년이었지요. 평소에 선생의 인품과 학덕을 사모해 오던 터라 두려운 떨림으로 다가섰어요. 선생님 또한 저의 단점이나 방황까지 긴 호흡으로 지켜주며 끔찍하게 아껴주었어요. 선생님의 인품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무얼까? 그래요, 가마에서 갓 구어낸 질그릇같은 분이었어요. 가슴은 무한대로 뜨거우면서도 겉으론 질박(質朴)하여 정이 느껴지는. 그래서 함께라면 늘 편안하고 늘 있는 그대로 대할 수 있는 따뜻함이었지요.

저의 작은 가슴은 얼마나 마음이 들뜨고 행복했는지 몰라요. 그 때까지 저는 동기(童妓)였거든요.

저는 제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선생님께 머리를 얹어 받고 싶었어요. 내 사랑은 하나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몸이 허약하신 선생님은 꽁당꽁당 뛰는 저의 마음을 모른 채 했어요. 얼마나 속이 상하고 마음이 괴로왔는지 몰라요. 사랑하면 예쁘게 보이고 싶고, 또 그가 껴안아주기를 바라는 것이 여자마음 아니여요. 저는 눈물까지 뿌리며 간청을 했어요. 그랬더니 마침내 선생님은 성인 식을 올려주었어요. 그러나 살은 섞지 않은 채 축하하는 시만 지어 주었어요.

어린 몸 수줍은 듯 고개 숙여/ 추파를 던져도 대답이 없네
마음은 부질없이 설레이건만/ 운우의 정은 풀지 못했네

그 뒤로 저는 더욱 정성껏 선생님을 모셨어요. 2년 간의 세월은 꿀처럼 달콤했어요. 그런데 벼슬을 버린 선생님은 해주의 석담(石潭)으로 돌아가 청계당(聽溪堂)을 짓고는 후학을 가르쳤어요. 그 때까지 관청에 소속된 저는 어쩔 수 없이 이별을 했지요.

우리는 가을에 만나 가을에 헤어진 거여요. 귀뚜라미가 우는 가을 밤은 한없이 적막하고 우울했고, 만남의 단절이 가져준 상실감은 정말 견디기 어려웠어요. 젊음이 일순간에 사그라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특히 선생이 떠난 자리에 그대로 놓인 원앙금침을 바라보면 혼자라는 외로움이 뼈까지 시려 왔지요. 그 동안 저는 너무나 익숙하게 선생님에게 길들여 있었나 봐요.

저는 오로지 선생님만 생각하고 굳게 지조를 지켰어요. 세월은 덧없이 흘러 가 저도 어느 새 24살이 되었어요. 하루는 중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선생님이 해주를 오셨어요. 꿈에도 그리던 분을 만나니 말보다는 눈물이 먼저 나와 옷고름을 잡아 당겼지요. 그러나 기쁨도 순간, 공무에 바빠 하룻밤만 머문다는 거지 뭐여요. 차라리 고통이었어요. 밤새 흐느끼며 회포를 풀었으나 그 때도 서로 몸은 범하지 않았어요. 떠나야할 낭군과의 하룻밤은 어찌 그리 짧던지…. 선생님 또한 밤 새 한 번도 붙이지 못한 벌건 눈으로 시를 한 수를 써 주며 이별을 안타까워했어요.

타고난 자태 선녀인 양 침착하고 고상하여
서로 알기 십년에 마음 움직임도 많았네
내 본래 목석같은 사내는 아니나
병으로 쇠약하여 화려한 꾸밈을 사양했을 뿐이네

이별은 누구에게나 눈물겹고 슬프지만 저 역시 창자를 끊어내는 아픔이 밀려왔어요.

그 후 선생님은 이조, 형조, 병조판서를 지내다가 결국은 49세의 짧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어요. 소식을 듣은 저는 몇 번이고 혼절하며 울부짓었어요.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절망감이 제 삶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어요. 마음으로 삼 년 상을 마친 저는 세상살이가 너무 허망해 머리를 깎고는 구월산으로 들어갔어요. 스님이 되어 오로지 선생님의 극락왕생만을 부처님 전에 빌었어요. 나중에는 안타까움은 가시며 깨끗한 그리움만 남았고, 세월이 흘러 저 역시 불귀의 객이 되었어요.

세상사람들은 저를 불행하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가치 있고 아름다운 사랑은 모두 슬픈 사랑이잖아요. 비록 무덤없는 외로운 혼이 구천을 떠돌지만 큰 분의 사랑을 받았으니 자부심을 느껴요. 그런데 현대인들은 왜 아름다운 사랑은 슬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영화나 소설에서 타인의 슬픈 사랑에는 깊은 감동을 받으면서 정작 자신은 쉽고도 편안한 사랑만 찾아 다니잖아요. 결국은 실망할거여요.

제가 얼마나 커다란 사랑을 받았는지가 궁금하시면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가 보세요. 선생님이 저에게 보낸 준 편지가 있어요. 그리고 통일이 되면 구월산으로 놀러 오세요. 산 길을 오르다 이름 모를 산 새가 지저귀면 그것이 바로 제가 여러분을 반기는 소리라고 생각하세요. 이곳은 산이 깊어 닭소리, 개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그런데 밝기만 하던 새벽 달이 빛을 잃네요. 아마 해가 뜨려나봐요. 그럼 이만 물러 갈께요. PS: 저승도 일요일은 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