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있는 뿌리깊은 이야기
배정자 본문
때는....... 우리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위기에 처해 있던 구한말.
무대는......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본에 망명해 있던 "김옥균"의 거처.
어느날 이곳에 "이토 히로부미"가 바둑을 두러 왔는데
김옥균 밑에서 심부름하던 여인을 보고 한눈에 뿅 가면서부터 일이 시작됩니다.
일본에서 눈치밥 먹으면서 망명생활을 하던 김옥균은 잽싸게 머리를 굴려
"이토"에게 그 여인을 수양딸 삼을 것을 권하게 됩니다.
호색가로 소문난 "이토"가 이를 마다할 리 없죠......덜컥 받아 들입니다.
이 여인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배정자"입니다.
배정자는 미색뿐만 아니라 머리도 영특했나 봅니다.
"이토"는 그녀에게 수영, 승마, 사격, 변장, 사교등을 가르치며
훗날 일본 밀정으로서의 훈련을 쌓도록 한 결과
그녀는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더없이 충실한 맹활약을 합니다.
이로 인해 대일본 관계에서 배정자가 끼지 않는 일이란 거의 없었으며
심지어는 조선 황실의 의전문제에서부터 창녀위생검사까지
그녀의 월권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위세가 높았습니다.
여기서 잠깐 배정자의 기구한 인생역정을 알아봅니다.
1) 1870년 김해 출생, 부친 사망하면서 집안 풍지박산 돼 어머니와 함께 유랑생활.
2) 12살때 어머니는 그녀를 통도사에 맡겨 졸지에 여승이 됨.
3) 좀이 쑤셨는지 1년뒤 절을 탈출하여 아버지 친구 "정병하"에게 의탁함.
4) "정병하"는 일본밀정인 "마쓰오"에게 그녀를 드라이버샷으로 날림.
5) "마쓰오"는 그녀를 일본망명 개화파인 "안경수"에게 세컨샷으로 패스.
6) "안경수"는 그녀를 "김옥균"에게 어프로치샷으로 인계.
7) "김옥균"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그녀를 나이스퍼팅으로 전달.
참으로 기구하기 짝이 없는 인생 히스토리죠?
그녀는 이런 히스토리에서 적지않이 히스테리를 받은 듯
일본에 빌붙어서 스파이로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끗발을 누리게 됩니다.
전세계를 경악시킨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에 따라 "이토"가 초대통감으로 부임하고
조선에 친일내각이 들어서자 그녀의 끗발은 최고조에 달합니다.
오빠는 한성판윤(서울시장), 동생은 경무감독관(경찰총장)으로 일약 승진합니다.
그런데 그녀의 가장 듬직한 빽줄이었던 "이토"가
하얼빈에서 "안중근의사"에게 사살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녀는 졸도하고 맙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토"는 그녀의 수양아버지이자 정부였거든요.
장하다.....안중근!! 잘 뒈졌다....이토 히로부미!!
이토 히로부미....이넘에 대해 잠깐 알아 볼까요?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더불어 우리 민족의 철천지 원수로 낙인 찍힌 이놈은
일본에서는 근대 일본의 불세출 영웅이자 근대의 아버지로 숭앙받습니다.
세계적으로도 루즈벨트, 처칠등과 같은 반열로 평가받는 대 정치가입니다.........쩝.
하층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놈은 메이지유신의 주역들과 교우를 맺으면서
일약 일본 개혁의 중심으로 활약하게 되는데
일본 근대사에서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게 없었다는 평가를 받는 놈입니다.
1854년 미국에 의해 강제 개국당하는 설움을 받았던 일본은
"일본역사를 지금부터 다시 쓴다"는 기치아래
15년후 전 내각의 반 이상을 해외견학 보내는 목숨을 건 노력을 단행하는데
그 사절단의 대표선수격이 당시 20대 후반였던 "이토"입니다.
메이지유신 주역들의 목적은 오로지 국가부흥에만 총 집결되었습니다.
후에 수상이 된 "고노에"가 아버지 사망후 빚 독촉을 받는 굴욕을 당한거나,
"이토" 암살 뒤 그 유가족들이 이렇다 할 재산이 없어 쩔쩔매자
천황이 집안 체면이라도 세우라고 30만엔을 보태줬다는게 이를 반증합니다.
여기에 비해 우리나라의 경우는 개차반이었습니다.
이완용, 송병준,민영휘,박영효등 매국노들은 1911년의 조사에서
조선 30대 자산가에 올라 있으니 이 얼마나 참담한 비교입니까.
매국노 부인들의 막가파식 음행도 또한 꼴불견입니다.
법무대신 이지용의 부인 "이홍경"은 일본 서기관들과의 밀통으로 소문 자자 합니다.
하기하라, 구니와케등과 바람피다가 그것도 양에 안차는지
조선주둔사령관인 "하세가와"하고도 붙습니다.
궁내대신 민영철의 부인 유씨의 난잡함도 이에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요염한 생김새로도 유명한 유씨는 "하세가와" 사령관과 내통한 것도 모자라
남편 출장중에 왜관과 북한산 승방을 무시로 출입하여 난잡한 빠구리를 합니다.
마이크를 다시 배정자에게 돌려서
그녀의 생생한 육성 증언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나.....배정자 우습게 보지마라 이거야.
이래봬도 일본, 시베리아, 만주, 조선을 누빈 국제적 여걸이라구.
세계정세에 빠삭한 국제통......나를 "린다 배"로 불러줘 잉.
조선독립? 흥! 꿈깨라...꿈깨!! 간단한 예를 들어 볼까?』
『대일본이 1892년 처음 소학교를 세워 나중에는 5만개 까지 늘어나
불과 12년 뒤에는 취학률을 98%로 끌어 올릴 만큼 열성인데......
조선이라는 나라는 어쨌는지 알어?
1895년 소학교령 발표하면서 소학교를 4개 세운 뒤,
그후 10년동안 조선정부가 몇개 더 세웠는지 알어?
겨우 6개 세웠다구, 6개.......비슷한 기간에 일본은 5만개나 됐는데 말야.
이런 나라가 어떻게 일본한테 안 먹힐 수가 있겠냐구』
『일본이 메이지 유신(1868)을 성공한이후 청일전쟁, 러일전쟁등으로 승승장구할때
세계는 얼마나 숨가쁘게 팽팽 돌아 갔는지 알어?
링컨암살(1865), 미국대륙 횡단철도 완성(1869), 런던 지하철 개통(1863)
노벨 다이나마이트 발명(1867), 수에즈운하 개통(1869)......굵직하지?
이때 조선은 겨우 한다는게 경복궁재건(1868) 동대문신축(1869)등이고
나라야 망하던 말던....... 백성이야 죽건 말건.......
민비와 대원군이 맨날 대갈빡 터지게 싸웠던 때야』
『내가 얼마나 화끈하게 일본에 충성했는지 알어?
만주에서 마적단에게 잡혔을 때도 오로지 충성심하나로 버티면서
마적단 두목과 계약 동거하면서 그넘들 정보를 빼냈을 정도야.
이거 아무나 못해.........김활란 그여자도 나보다는 한참 떨어져.
그 뿐인줄 알어?
남양군도의 일본군인들 면회 갈 때도 빈손으로 가는게 미안해서
정신대 100 여명 데리고 가서 기쁘게 해 줬다 이거야』
『그리구 말야.....사내 놈들도 정신머리가 썩어 빠졌어.
내가 한 끗발 한다고 소문이 쫙 나니까 이놈 저놈 들러 붙더라구.
통역관이던 "현영운"......이놈이 첫 남편이야......내 빽으로 차관까지 승진했지.
나를 누나처럼 따르던 "박영철"......이놈도 내가 쪼까 데리고 놀았지.
전라도 갑부 조익헌, 대구 갑부아들 정경진, 일본인 오하시..........어휴 숨차라』
『흥! 썩어 빠지기는 이승만 정권도 마찬가지더라 야.......
해방 이후 집에 숨어 지내는데 "반민특위"가 제정돼서 날 잡아가대?
아이고 이제 죽었구나 생각했었는데......웬걸?
정치권 싸움으로 "반민특위"가 흐지부지되더니 슬그머니 풀어주대?
그래서 어쨌냐구?
1951년에 81살의 나이로 제명대로 살다가 죽었다 왜..... 꼬운거 있어?』
무대는......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본에 망명해 있던 "김옥균"의 거처.
어느날 이곳에 "이토 히로부미"가 바둑을 두러 왔는데
김옥균 밑에서 심부름하던 여인을 보고 한눈에 뿅 가면서부터 일이 시작됩니다.
일본에서 눈치밥 먹으면서 망명생활을 하던 김옥균은 잽싸게 머리를 굴려
"이토"에게 그 여인을 수양딸 삼을 것을 권하게 됩니다.
호색가로 소문난 "이토"가 이를 마다할 리 없죠......덜컥 받아 들입니다.
이 여인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배정자"입니다.
배정자는 미색뿐만 아니라 머리도 영특했나 봅니다.
"이토"는 그녀에게 수영, 승마, 사격, 변장, 사교등을 가르치며
훗날 일본 밀정으로서의 훈련을 쌓도록 한 결과
그녀는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더없이 충실한 맹활약을 합니다.
이로 인해 대일본 관계에서 배정자가 끼지 않는 일이란 거의 없었으며
심지어는 조선 황실의 의전문제에서부터 창녀위생검사까지
그녀의 월권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위세가 높았습니다.
여기서 잠깐 배정자의 기구한 인생역정을 알아봅니다.
1) 1870년 김해 출생, 부친 사망하면서 집안 풍지박산 돼 어머니와 함께 유랑생활.
2) 12살때 어머니는 그녀를 통도사에 맡겨 졸지에 여승이 됨.
3) 좀이 쑤셨는지 1년뒤 절을 탈출하여 아버지 친구 "정병하"에게 의탁함.
4) "정병하"는 일본밀정인 "마쓰오"에게 그녀를 드라이버샷으로 날림.
5) "마쓰오"는 그녀를 일본망명 개화파인 "안경수"에게 세컨샷으로 패스.
6) "안경수"는 그녀를 "김옥균"에게 어프로치샷으로 인계.
7) "김옥균"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그녀를 나이스퍼팅으로 전달.
참으로 기구하기 짝이 없는 인생 히스토리죠?
그녀는 이런 히스토리에서 적지않이 히스테리를 받은 듯
일본에 빌붙어서 스파이로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끗발을 누리게 됩니다.
전세계를 경악시킨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에 따라 "이토"가 초대통감으로 부임하고
조선에 친일내각이 들어서자 그녀의 끗발은 최고조에 달합니다.
오빠는 한성판윤(서울시장), 동생은 경무감독관(경찰총장)으로 일약 승진합니다.
그런데 그녀의 가장 듬직한 빽줄이었던 "이토"가
하얼빈에서 "안중근의사"에게 사살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녀는 졸도하고 맙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토"는 그녀의 수양아버지이자 정부였거든요.
장하다.....안중근!! 잘 뒈졌다....이토 히로부미!!
이토 히로부미....이넘에 대해 잠깐 알아 볼까요?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더불어 우리 민족의 철천지 원수로 낙인 찍힌 이놈은
일본에서는 근대 일본의 불세출 영웅이자 근대의 아버지로 숭앙받습니다.
세계적으로도 루즈벨트, 처칠등과 같은 반열로 평가받는 대 정치가입니다.........쩝.
하층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놈은 메이지유신의 주역들과 교우를 맺으면서
일약 일본 개혁의 중심으로 활약하게 되는데
일본 근대사에서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게 없었다는 평가를 받는 놈입니다.
1854년 미국에 의해 강제 개국당하는 설움을 받았던 일본은
"일본역사를 지금부터 다시 쓴다"는 기치아래
15년후 전 내각의 반 이상을 해외견학 보내는 목숨을 건 노력을 단행하는데
그 사절단의 대표선수격이 당시 20대 후반였던 "이토"입니다.
메이지유신 주역들의 목적은 오로지 국가부흥에만 총 집결되었습니다.
후에 수상이 된 "고노에"가 아버지 사망후 빚 독촉을 받는 굴욕을 당한거나,
"이토" 암살 뒤 그 유가족들이 이렇다 할 재산이 없어 쩔쩔매자
천황이 집안 체면이라도 세우라고 30만엔을 보태줬다는게 이를 반증합니다.
여기에 비해 우리나라의 경우는 개차반이었습니다.
이완용, 송병준,민영휘,박영효등 매국노들은 1911년의 조사에서
조선 30대 자산가에 올라 있으니 이 얼마나 참담한 비교입니까.
매국노 부인들의 막가파식 음행도 또한 꼴불견입니다.
법무대신 이지용의 부인 "이홍경"은 일본 서기관들과의 밀통으로 소문 자자 합니다.
하기하라, 구니와케등과 바람피다가 그것도 양에 안차는지
조선주둔사령관인 "하세가와"하고도 붙습니다.
궁내대신 민영철의 부인 유씨의 난잡함도 이에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요염한 생김새로도 유명한 유씨는 "하세가와" 사령관과 내통한 것도 모자라
남편 출장중에 왜관과 북한산 승방을 무시로 출입하여 난잡한 빠구리를 합니다.
마이크를 다시 배정자에게 돌려서
그녀의 생생한 육성 증언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나.....배정자 우습게 보지마라 이거야.
이래봬도 일본, 시베리아, 만주, 조선을 누빈 국제적 여걸이라구.
세계정세에 빠삭한 국제통......나를 "린다 배"로 불러줘 잉.
조선독립? 흥! 꿈깨라...꿈깨!! 간단한 예를 들어 볼까?』
『대일본이 1892년 처음 소학교를 세워 나중에는 5만개 까지 늘어나
불과 12년 뒤에는 취학률을 98%로 끌어 올릴 만큼 열성인데......
조선이라는 나라는 어쨌는지 알어?
1895년 소학교령 발표하면서 소학교를 4개 세운 뒤,
그후 10년동안 조선정부가 몇개 더 세웠는지 알어?
겨우 6개 세웠다구, 6개.......비슷한 기간에 일본은 5만개나 됐는데 말야.
이런 나라가 어떻게 일본한테 안 먹힐 수가 있겠냐구』
『일본이 메이지 유신(1868)을 성공한이후 청일전쟁, 러일전쟁등으로 승승장구할때
세계는 얼마나 숨가쁘게 팽팽 돌아 갔는지 알어?
링컨암살(1865), 미국대륙 횡단철도 완성(1869), 런던 지하철 개통(1863)
노벨 다이나마이트 발명(1867), 수에즈운하 개통(1869)......굵직하지?
이때 조선은 겨우 한다는게 경복궁재건(1868) 동대문신축(1869)등이고
나라야 망하던 말던....... 백성이야 죽건 말건.......
민비와 대원군이 맨날 대갈빡 터지게 싸웠던 때야』
『내가 얼마나 화끈하게 일본에 충성했는지 알어?
만주에서 마적단에게 잡혔을 때도 오로지 충성심하나로 버티면서
마적단 두목과 계약 동거하면서 그넘들 정보를 빼냈을 정도야.
이거 아무나 못해.........김활란 그여자도 나보다는 한참 떨어져.
그 뿐인줄 알어?
남양군도의 일본군인들 면회 갈 때도 빈손으로 가는게 미안해서
정신대 100 여명 데리고 가서 기쁘게 해 줬다 이거야』
『그리구 말야.....사내 놈들도 정신머리가 썩어 빠졌어.
내가 한 끗발 한다고 소문이 쫙 나니까 이놈 저놈 들러 붙더라구.
통역관이던 "현영운"......이놈이 첫 남편이야......내 빽으로 차관까지 승진했지.
나를 누나처럼 따르던 "박영철"......이놈도 내가 쪼까 데리고 놀았지.
전라도 갑부 조익헌, 대구 갑부아들 정경진, 일본인 오하시..........어휴 숨차라』
『흥! 썩어 빠지기는 이승만 정권도 마찬가지더라 야.......
해방 이후 집에 숨어 지내는데 "반민특위"가 제정돼서 날 잡아가대?
아이고 이제 죽었구나 생각했었는데......웬걸?
정치권 싸움으로 "반민특위"가 흐지부지되더니 슬그머니 풀어주대?
그래서 어쨌냐구?
1951년에 81살의 나이로 제명대로 살다가 죽었다 왜..... 꼬운거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