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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여황 본문

.....古典(고전)

측천무후여황

AziMong 2008. 4. 28. 21:37
땅덩어리 넓고 벼라별 인물들이 많은 나라 중국에서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자가 등장하니
바로 중국유일의 여성황제 측천무후임다(624-705).
유럽각국에는 고금을 통털어 여왕덜이 쌔고 쌨고,
하다못해 동양의 울나라와 일본에도 유명한 여왕덜이 등장함다만
중국에서는 이 여자가 최초이자 마지막 여왕임다.

여황제로 즉위하던 날 세계각국의 이름 값하는 여자들로부터 축전이 쇄도함다.

힐러리 : 입만 보고도 바람핀거 알아 맞추는 비법 소개
이멜다 : 질좋고 광나는 구두 몰래 사는 기법 공개
이순자 : 주걱으로 남자 흥분시키는 테크닉 전수

뿐만아니라 "주간당나라" "선데이당나라"등 친여 언론기관덜은 앞다투어
일면통광고를 실어 제끼며 이따우 용비어천가를 노래함다.

"무후님 치마폭 안에서 우리는 아무런 부러움 없어라"


본 이름이 "무조"인 이 여자는 지방 건설공무원의 딸로서 14살의 애리애리한 나이에
당나라 2대 천자인 태종의 후궁으로 들어갑니다.
서슬이 시퍼런 미성년특별보호법이 있었기는 했지만
나라의 최고권력자가 "미녀특별채용촉진법"을 상위법으로 공포했기에
청소년윤리위원회도 거저 멀뚱멀뚱 눈 감아 줄 수 밖에 없었담다.

"무조"가 들어간 왕궁에는 미스월드 뺨치는 미인들이 득시글 대고 있었슴다.
제깐에는 지방에서 "상추아가씨" "율무아가씨"등 2관왕 먹은 걸로 폼잡고 올라왔지만
3천여명이나 되는 압구정출신들의 화려한 미모앞에서는 쪽도 못쓰는 신세임다.

참고로 당나라 후궁의 끗발순서를 간략하게 소개하자믄
황후(1명) - 부인(4명) - 빈(9명) - 세부(27명) - 어처(81명) 등의
금테두른 여자들 122명을 위시하여 총 3천여명의 여자덜이 널러리 있는 검다.
"무조" 는 태종의 눈에 띄이지못한채 별볼일엄씨 빌빌빌 지내다가
엉뚱하게도 태종의 아들인 "치"(훗날 당고종)의 눈에 확 띄게 됨다.

어느날 태종이 죽자 그 당시의 관습대로 후궁덜은 죄다 절에 들어가게 됨다.
쓸데엄씨 딴맘 먹지 말고 돌아가신 천자의 극락왕생을 빌어라...이거죠.
덕분에 절 주변에는 "바늘장사"와 "이쑤시개장사"가 성황을 이뤘다 함다. 왜 그럴까?
암튼 "무조"도 별수 엄씨 절에 들어가 한숨만 폭폭 쉬며 지냈는데............


"무조"가 절에서 "수덕사의 종소리"나 불러 제끼며 여생을 마쳤더라면 좋았을텐데
절에 간지 3년만에 태종 아들인 고종이 그녀를 후궁으로 재취업시키면서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녀를 중심으로 거대한 굉음을 내며 돌아가기 시작함다.
14살에 궁에 들어가서, 26살에 절간에 이송됐고, 다시 3년만인 29살의 농익은 몸으로
아버지 태종에 이어 아들 고종의 후궁으로 화려한 컴백을 하게 된 "무조"

그녀가 훗날 "측천무후"라는 이름으로 여황제가 되자 궁녀때의 한이라도 풀려는듯
남첩 3천명을 거느리면서 온갖 음락과 기행을 저지름다.
더구나 선택된 남첩들에게는 갖가지 권력과 혜택을 통크게 선물했으므로
당시의 젊은 남자덜 사이에서는 "남첩"이 각광받는 벤처사업으로 떠올랐슴다.

이런 움직임을 재빨리 간파한 출판업자덜이
"성공하는 남첩의 7가지 습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남첩" "부자 남첩, 가난한 남첩"을
있따라 히트시키자, 영화제작사들도 이에 질세라
"공동남첩구역" "남첩No.3 " "남첩이 동쪽으로 간 까닭은?"등의 명작을 만듬다.
모두들 알랑방구까는데 가요계라고 가만있겠슴까?
심수뿅이 부른 "남첩밖엔 난 몰라"는 국민건전가요로 널리 불리어지는 한편
터진애가 부른 "남첩은 아무나 하나"는 체제비판했다고 금지곡으로 묶이기도 했슴다.


여기서 잠깐.....

당시의 중국(수나라, 당나라)과 울나라(고구려)의
장장 70년에 걸친 피튀기는 전쟁을 간략하게 소개함다.
수의 몰락과 당의 등장, 당태종의 사망과 고종및 측천무후의 등장등이
이 전쟁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기 때문임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서쪽으로는 요동, 북쪽으로는 만주, 남쪽으로는 한강까지
"앞으로 앞으로 전진 또 전진"을 외치며 질풍노도, 전광석화, 파죽지세의 공격으로
울나라 역사상 최대의 영토확장에 성공함다.
아아......요동과 만주의 그 넓디 넓은 벌판,
신도시 수백개, 골프장 수만개, 서해안 간척사업 수십만건을 한번에 땜빵해도
자자손손 두고두고 우려먹을 수 있는 그 대륙......

통이 크기도 큰 고구려는 여기에 만족치 않고 영양왕때 요서지방을 공략함다.
(울나라가 이웃을 침략한 적 엄는 평화주의국가라는 말 .......이거 생판 거짓임다)
수나라 문제는 귀신잡는 고구려개병대의 명성에 지레 겁먹고
"에이 뭐.... 그냥 쪼끔 떼주고 말지"하고 응수를 안했으나
야당의원덜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탄핵위기에 까지 몰리자
마지못해 30만 대군을 이끌고 출정을 하게 됨다.
그런데 보급식량중에 납덩이 들은 게를 먹은 병사들이 설사 복통에 시달리면서
전력이 크게 손실된데다 고구려군의 엄청난 반격에 힘 한번 제대로 못쓰고
"각자 고향앞으로 토껴!" 명령을 내리며 후퇴함다(598년)

새로 왕이 된 수양제는 선왕의 원수를 갚을 작정으로
정예육군과 해병대, 해군등 총 113만명을 동원해 고구려 정벌에 나섬다.
그러나 고구려에서 열리는 ASEM회의 때문에 검문소에서 홀짝제를 강화하는 바람에
마차, 수레, 함정이 절반이나 통행금지 당한데다
을지문덕장군의 신출귀몰한 작전에 휘말려 이리저리 휘몰리다가
살수에서 개박살이 나도록 처참하게 깨지게 되니
이게 그 유명한 살수대첩임다.(612년)
이 전투에서 살아돌아간 병사가 고작 2천여명에 불과하다고 기록돼있으며
이때의 국력소모로 수나라는 멸망하게 되고 당나라가 등장함다.
(이 대목에서 우리국민덜은 기립박수를 쳐야 마땅함다)

당나라의 태종.....아시죠? 측천무후가 첫 후궁으로 들어갈 때의 천자였던 넘.
이 넘은 한반도의 사대주의자인 신라 김춘추의 요청으로 고구려를 치려고 함다.
고구려는 대륙을 놓고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는데 신라 백제 이 넘덜은
제 한몸 살자고 외국군대를 끌여들이는 멍청한 짓거리를 하는 검다.
대개 나라를 새로 세운 넘덜은 뭔가 그럴듯한 명분으로 과시를 하고 싶어하는 법!
그러지않아도 수나라 때와는 뭔가 다르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근질근질하던 차에
태종은 충신 이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30만의 대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함다(645년)

첨에는 창경원 벚꽃놀이하듯 쉬엄쉬엄 요하일대의 고구려성을 정복하던 수나라
드뎌 임자를 만나게 됨다.
고구려 백골부대장인 안시성의 왕초 양만춘과 마주치게 되는 검다.
연개소문의 강력한 신임을 한몸에 받고있던 싸나휘 양만춘!!!
고구려 여인들의 인기투표 1위를 독차지하던 터프가이 임전무퇴의 명장.
그는 불과 3만명의 군사,주민들만으로 장장 2,3개월을 꿋꿋이 버텨 냄다.
그 뿐임까?
활쏘기 선수들이 시드니올림픽에 참가하느라 후보 선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신들린 솜씨를 발휘해 당태종의 한쪽 눈을 정확히 맞추는 전과를 올림다.

참고로.....
이 당시 중국과 울나라의 전쟁은 양국간의 전투가 아니라 동북아시아 국제전임다.
중국과 신라,백제,왜가 한편이고
고구려와 말갈,거란,돌궐등이 또 다른 한편을 이루고 싸웠던 전쟁임다.
고구려는 이들 북방민족들을 통크게 감씨안는 "북방정책"을 펼치면서
중국을 효율적으로 방어 공격하는 양면작전을 구사한거죠.
북방정책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 "정책"이라는 소릴 듣는 검다.

그런데 고구려의 영류왕이라는 이름만 그럴듯하게 멋드러진 왕이 등장하면서
"민족은 국가에 우선한다"는 어디서 많이 들은듯한 주장을 내세우며
북방민족 알기를 요즈음 조선족 알 듯 무시해버리는 또라이 짓을 함다.
그러자 북방민족들이 토사구팽당했다며 중국편을 드는 몽니를 부리면서
고구려의 방어진에는 치명적인 커다란 구멍이 뚫리게 됨다.
이를 염려한 연개소문이 궁정동안가에서 거사를 단행하여
영류왕을 제거하고 국보위법을 발동하고 자신은 국보위원장에 오르면서
"아직도 그대는 내사랑"이라는 음반을 취입해 북방민족을 꼬시지만
옛날의 기세는 점점 사그라들고 형제 자식간의 내분으로 멸망하게 됩죠.


각설하고....
당나라군대는 이 전투에서 개떡이 되도록 많은 희생자를 내며 철수하게되고
당태종은 이 때의 상처 휴유증으로 52살의 나이로 숨지면서 아들에게 유언을 남김다.
"절대로 고구려와 전쟁하지 말아라"
아마도 중국 역대 왕중에 이런 쪽 팔리는 유언 남긴 왕도 없을 검다.
그만큼 고구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만큼 등등했다는 반증이기도 함다.
얼마나 호되게 당하고 겁을 먹었던지
중국축구의 고질병으로 알려져있는 "공한증"이라는 유전자가 이때 형성돼
두고두고 중국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다고 함다.
울나라 축구관계자덜은 고구려인들에게 크게 한 턱 내야 함다

여기에서 태종의 유언을 받아적으며 등장하는 아들인 "치"가 바로 당고종으로서
아버지 당태종의 후궁 "무조"를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다가
나중에는 황후로 격상시키고 종래에는 황제자리까지 뺏기는 얼간이 왕이올시다.
이 넘은 성격이 본래 유약한데다 아버지말에는 무조건 복종하는 덕에
고구려국경에는 얼씬도 못하며 지냄다.
이때 확 밀어붙였으면 저 넓은 중원전체가 우리 손아구에 들어오는건데
신라 백제의 농간과 연개소문의 아들,형제의 내분때문에
한반도의 맏형 고구려는 힘없이 쓰러지게 되고 맘다.

후궁으로 불려들어온 "무조"는 자기를 추천한 왕황후는 물론 라이벌 소숙비를 내쫓고,
자신이 낳은 딸을 살해하여 황후에게 뒤집어 씌워 끝내 죽여 버리고,
자신의 남편인 당고종을 고양이 쥐 태종의 후궁으로 궁중에 들어온 "무조"는 마치 왕따를 당하는 기분임다.
태종의 총애를 받아 잘나가는 애들은 영화,TV의 주인공이나, CF모델로 맹활약하며
밤에는 재벌들과 놀아 제끼면서 고급차와 외제옷을 자랑하고 다니는데
"무조"에게는 기껏 싸구려 에로영화나 찌라시모델 섭외만 들어오니 안 그렇겠슴까?

그러던 차에 후궁 대빵으로부터 태종의 간병 당번을 명령받으니 기분이 더 잡칩니다.
그러나 이게 전회위복이 될 줄 그 누가 알았겠슴까?
마침 그 자리에는 태종의 아들인 治(훗날 고종)이 문안차 와 있던 거였슴다.

일이 되느라고 그랬는지
그 날 따라 주치의들은 의약분업문제로 서로 치고 받고 싸우느라 아수라장임다.
태종이야 꼴까닥하건 말건 농성과 가두행진에 여념이 없는 검다.
그 싸움을 뜯어말리다지친 治가 문득 옆을 보니 웬 여인이 정성껏 치료를 하잔슴까?
감복한 治가 찬찬히 뜯어보니.....오옷! 바로 자기의 이상형!!!

당나라의 미인형 기준은 "네모이마와 사각턱"을 으뜸으로 쳤슴다.
잘 상상이 가지 않으신 분은 목소리 큰 개그우먼 박경림을 생각하시믄 되겠슴다.

박경림....세상을 잘 못 만나 그렇지 하마터면 여황제 될 뻔 했슴다 그려.
어쨌거나, 갑자기 마음이 동한 治가 "무조"의 손을 잡고 옆방으로 끌고가 일을 치룸다.
태종의 총애를 받지못했던 "무조"는 꿩대신 닭이라도.....하는 심정으로 응함다.
이후로 治의 마음속에는 무조가 깊숙히 자리잡게 됨다.


세월이 흘러 태종은 숨을 거두고 후궁들은 죄다 트럭에 실려 101보충대로 이송함다.
"보람찬 하루일을 끝마치면서"를 소리높여 부르며 도착한 곳은 "감업사"라는 절임다.
그 곳에서 "무조"는 3년을 썩으며 治가 고무신 거꾸로 신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함다.

고무신에 강력접착제라도 붙였는지 아니면 治가 발 씻기를 게을리 했는지는 몰라도
治는 "무조"를 다시 재입궁시킨 다음에야 그 고무신을 벗었다고 함다.
"무조"는 너무 기쁜 나머지 한번 기절하고 발 꼬랑 썩은 냄새에 두번 기절함다.

일설에는 治(고종)부인인 왕황후의 계략이라는 설도 있슴다.
고종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소숙비를 견제하기위해 불러 들인 거라는 거죠.
어쨌거나 왕황후는 치명적인 실수를 한검다.

처음에는 자기의 계략대로 고종이 소숙비를 멀리하더니 아예 "무조"에게 푸욱 빠진검다.
게다가 아들까지 낳은 "무조"는 목에 잔뜩 기브스한채 언제나 헤드업인 상태임다.
왕황후는 소숙비와 연합전선을 맺어 "너와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를 합창하지만
되려 역공을 당해 무조에게 잔혹하게 살해 당하게 됨다.

그럼 지금부터 "무조"의 잔인한 엽기행각을 사건일지 순으로 보도할까 함다.

▲첫 딸 살해
무조가 낳은 딸을 보러 고종이 침소를 방문했을때 무조는 미리 딸을 죽여 놓고는
고종을 영접하여 정원산책을 하자고 꼬심다.
이윽고 산책을 마치고 방안에 들어와서는 죽은 딸을 보고 경악하는 쑈를 벌임다.

고종이 시녀를 불러 도대체 어떻게 된일이냐고 추궁을 하자
"왕황후가 아까 다녀갔다"고 대답함다.......완전히 짜고 치는 고스톱이죠.
이 음모를 위해 "무조"는 환관과 시녀 신하들에게 돈 수억 풀어 매수함다.
이 술수로 왕황후는 쫓겨나고 "무조"가 드뎌【황후】의 자리에 오름다.

▲왕황후, 소숙비 살해
음모로 쫓겨나 지하감옥에 갇힌 왕황후와 소숙비가 어느날 하소연함다
"제발 이 냄새나는 곳에서 꺼내 목욕 좀 시켜달라"고 말임다.
무조가 두 여인을 꺼내 우물가에 세운뒤 발로 차 빠뜨리자
두 여인이 무조에게 저주의 욕설을 퍼붓슴다.
무조는 두 여인을 꺼내 곤장 100대를 때려 반죽음 시킨 뒤 손발을 잘라서
술독에 넣어 서서히 죽게 만들어 버림다.

▲아들 弘 살해
황후가 된 무조(무후)는 아들 홍을 태자로 삼게 되는데 이 넘이 참 착한 넘임다.
소숙비의 두 딸이 옥에 갇혀 있는걸 구해주려고 애쓰다 그만 발각돼 무후에게 독살당함다.
로미오와 줄리엣,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를 꿈꾸던 弘이 제 엄마에게 죽임을 당한 검다.

▲아들 賢 자결케 함
弘의 뒤를 이어 현을 태자로 책봉한 무후는 賢이 학문을 숭상하고 신하들의 신임을 얻자
자기의 야망에 껄끄러운 방해물이라고 판단해서 모반의 죄목을 뒤집어 씌워
사천성에 유배시킨뒤 후한을 없애려 아예 자결하도록 함다........독하죠?

▲아들 顯(현) 왕위에서 쫓아 냄
남편인 고종이 사망하자 아들인 顯이 제위에 오름다......중종이죠.
근데 이 중종의 마누라인 위황후가 권세를 등에 업고 하도 설쳐대다가 무후에게 찍힘다.
결정적인 계기는 위황후가 아버지를 장관에 앉히려고 로비를 하다가 야당에게 들킨검다.
청문회에 불려가 조사를 받다보니 중종도 깊이 연관돼 있는게 드러나자
무후는 변명할 틈도 주지않고 중종에게 전화해서 "넌 오늘부터 왕이 아냐"라고 통지함다.

▲아들 旦(단) 허수아비 왕으로 만듬
중종을 쫓아낸뒤 아들 단을 왕위에 앉히고( 예종).....지켜보니 왕하는 짓이 한심해 보임다.
무후는 "여자라고 왕이 못될소냐....."라고 불끈 맘 먹고 드디어 중국최초의 여왕이 됨다.
에종은 다시 태자의 자리로 원위치!
이때가 690년으로 무후의 나이 67살때의 일임다.

▲이씨 왕족의 씨를 말림
여황제의 집권을 지탱한 가장 큰 힘은 밀고제도에 의한 공포정치임다.
여황제는 툭하면 TV에 출연해서 "땡전뉴스"의 원조격인 "땡무뉴스"를 남발하면서
"국정쇄신은 밀고제도로부터"를 강력 주창하고,
"우리는 밀고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당나라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저 유명한 "국민밀고헌장"을 발표하여 년말 암기대회까지 개최함다.

해바라기성 편집자덜두 삐약삐약 알랑대며
"올해의 밀고왕", "오손도손 웃음가족 알고보니 밀고가족"등의
프로그램을 방영하면서 전국적인 밀고 국풍운동을 전개함다.

여황제가 추진하는 밀고제도의 특징은 설령 그 내용이 거짓이라도 문책 안하는데 있슴다.
또 이 밀고로 고발된 사람덜을 고문하기위한 "고문사관학교"를 설립해
한반도의 고문기술특사인 "이군안"을 초대교장으로 스카웃해오는 한편
동빙고,서빙고를 벤치마킹해 숱한 인재를 배출해 정권유지에 활용함다.

역사에 기록된 고문 기술자덜중 내준신,색원래,주홍등은 특히 악명이 자자함다.
이들의 활약으로 이씨왕족과 귀족들은 거의 몰살당하다시피 함다.
바햐흐로 "무씨"의 전성시대가 도래하게 되고,
민초들은 끽소리 못하는 공포정치시대가 시작 되는 거죠.
다음 편에는 측천무후의 대표적인 엽색행각을 심층보도 해 드릴람다
여황제의 남색행각은 아주 유명함다.
본인 스스로도 잘생긴 남자덜을 채용해서 데리고 놀기도 했지만
아부하기 좋아하는 밑의 넘덜이 추천한 남자덜이 대부분임다.

기가 막힌것은 딸내미도 남자덜을 추천했다는 검다.
엄마와 딸이 공동으로 포주노릇 했다는 얘기는 종종 들어봤어도
딸내미가 어미에게 남자애인을 소개했다는 예는 참으로 희귀함다.
대표선수 두넘만 소개함다.


▲천금공주가 추천한 "설회의"

이 넘은 체격좋은 괴력의 소유자로 떠돌이 약장사 땡초 올시다.
여황제는 이 괴승을 아예 끼고 살다시피하며 총애하고 어마어마한 특권을 선물함다.

약장사니까 몸에 좋은 산삼,녹용은 입에 달고 살던 이 넘이 약발이 떨어져 빌빌대자
여황제는 신제품 비아그라를 개발한 주치의사인 "심남구"와 쩔거떡 붙어 버림다.
쫑따구가 난 괴승"설회의"가 몰카테이프를 공개한다고 깝삭거리다가
여황제가 풀어놓은 신사동의 깍두기들에게 보리타작하듯이 맞아 죽슴다.


참고로.....
역사에 등장하는 괴승 중에 유명한 두 사람이 있슴다.
러시아의 "라스푸틴"과 울나라의 "신돈"이 바로 그 들임다.


심령주술사"라스푸틴"은 러시아 최후의 황제 니콜라이2세의 빽을 믿고 설쳐대던 넘으로
"라스푸틴이 없었다면 러시아혁명도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 넘임다.

이 넘이 얼마나 설쳐댔냐면 2년동안 수상4명,국방상6명,내상4명을 갈아 치울 정도임다.
또한 거근의 소유자라는 소문을 듣고 불나비처럼 뎀비는 귀족부인덜을 모조리 해치우고,
공주들의 방에 노크없이도 무상 출입할 정도로 난잡했다고 함다.

황제 버금가는 권세로 정권을 개판으로 휘두르며 흥청망청 아사리 잡판처럼 노니
러시아의 농민들은 기아에 허덕이다가 급기야는 혁명을 일으키게 되는 거죠.


땡초 "신돈"은 공민왕의 강력한 신임으로 높은 벼슬에 올라 서민위주의 개혁정책을 폄다.
농민입장에서는 "성인이 탄생했다"는 환영을 받고,
귀족입장에서는 "악마가 출현했다"는 모함을 받았던 사람임다.

그런데 동성애자로 소문난 공민왕과 함께 일하다보니 살짝 맛이 갔는지
말 거시기를 고아먹으며 힘을 비축하여 사대부 부인덜과의 엽색행각을 벌이는 검다.
거기다가 자신의 애첩인 "반야"를 공민왕에게 원조교제토록 해서 아기를 갖게되니
이 아기가 바로 "우왕"임다.


▲태평공주가 선물한 "장창종"

장동건 찜쩌먹게 생겨먹은 이넘은 69살의 여황제를 뻑가게 요리해 버림다.
매우 흡족해있는 여황제에게 이넘은 자기 형인 "장역지"을 추천해서 입궁시킴다.
형제와 따블로 즐기던 여황제는 이들이 독수리 5형제가 못 됨을 못내 아쉬워 함다.

궁중에서 "二張"이라고 불리웠던 이넘들도 설쳐대기는 마찬가지임다.
늙은 대신덜두 이들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설설 기며 "받들어 총"을 외침다.

시중에는 "잘 키운 남첩하나 열 아들 안부럽다"는 유행어가 퍼지고,
"남첩이 가득한 집"이라는 월간지가 불티나게 팔리는가 하면
�그룹 들국카가 부른 "남첩만이 내 세상"이 당나라가요제 대상을 수상함다.

69살 먹은 여인이 새파란 젊은 사내와 어떻게 그럴수 있냐구여?
그 무슨 섭섭한 말씀을.....

괴테는 72살때 17살의 뷔르리케에게 청혼을 했는가 하면
빅톨 위고는 70살 넘어서도 하녀인 부랑쉬와 정을 통했고
앙드레지드 또한 75살에도 불구하고 어린 여성과 관계를 했담다.

그러니 여황제가 이들에게 꿀릴께 뭐 있겠슴까?
오히려 젊은 넘덜이 쌍코피 흘리면서 퍽퍽 나가 떨어졌다고 함다.
그래서 여황제는 자기가 즐겨먹던 정력강장제를 남자덜에게도 먹였담다.
병주고 약 주는격이죠.

울나라도 그런 기관이 하나있습죠....
..............담배인삼공사!

그회사의 사훈이.....

"담배로 망친 몸,............................................. 인삼으로 추스리자" 라던가요?


여황제가 즐겨먹던 강장제는 그 이름도 유명한 "무후주"
메추리(참새와 비스무리)로 담근 술인데 효과가 아주 쎈 강장주임다.
.......암튼,
여황제는 이들과의 관계를 부당하다고 진언한 맏손주를 살해하고,
이들과 사이가 안좋은 영태공주를 자살로 몰고 갈 정도로 이넘덜을 아낌다.


일설에 따르면 남첩 3천명을 두고 갖은 음락을 즐겼다는 여황제는 역사상 드문 음녀로,
서양의 "메사리나"에 버금가는 밝힘증 여인임다.
밝히기로 말하면 이 여자도 빼 놓을 수 없죠....
메사리나는 로마황제 크라디우스의 아내로서
남편과의 나이차이는 무려 35살!!!

이 여자는 욕구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자주 미남배우덜을 초대해 난교파티를 여는데
그 걸로는 성에 안차는지
아예 밤마다 창부로 변장해 588에 위장취업을 해서
손님덜과 밤새 그짓을 하고도 새벽에 아쉬움이 남는 얼굴로 궁전으로 돌아갔다고
기록돼 있슴다.


세월은 어쩔수 없는지 여황제도 병들어 골골골 앓게 되고 二張의 전횡은 끝간데를 모름다.
이런 개판상황에 염증을 느낀 신하들이 태자 顯(현)을 앞장세워 궁정을 습격해서
二張을 주살해버리고 여황제를 협박해 顯에게 황제양위를 요구하게 됨다.
힘도 없고 빽도 없어진 여황제는 병석에서 링게루로 연명하다가 82살의 나이로 죽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중국유일의 여황제는 이렇게 생을 마감함다.


후일담 하나...
측천무후의 뒤를 이어 황제자리에 오른 顯(현)....곧 중종이죠.
아까 말씀드렸죠? 마누라인 위황후가 너무 설쳐대 쫓겨난 놈이라구.......

위황후 이 여자도 보통은 아님다.
"나도 때로는 황궁의 주인공이고 싶다"라는 책을 펴내면서 욕심을 부리더니
남편인 중종을 독살하고 정권을 탈취해버림다.
자기도 여황제가 되고 싶었던거죠.

그러나 旦(단)의 똑똑한 아들 "이융기"가 기습공격을 감행해서 위황후를 살해해버림다.
旦이 누구냐구요?
지난 편에서 말씀드렸죠.
무후의 아들로서 황제자리에 올랐다가 (예종)
하는 꼴이 영 시덥잖아서 무후한테 황제자리를 빼앗긴 넘이죠.

旦의 아들, 머리좋고 행동민첩한 이융기.....
이 사내가 바로 양귀비와의 로맨스로 유명한 현종임다.


비록 "음란과 공포"로 낙인 찍힌 여황제이기는 하지만
그녀의 치적은 무시 할 수가 없습니다.

당나라 제국사상 최대 영토를 자랑한 것도 그녀의 재위시절이고
눈엣 가시처럼 골치 아프던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도 그녀의 통치력이며
중국역사상 농민들의 시위가 한 번도 없었던 것도 그녀의 정치력에 기인합니다.

무엇보다도 후대의 역사가들인 그녀를 높게 평가하는 대목은
바로 인재감별과 인재양성입니다.
그녀의 재위시절 과거고시를 통해 발탁된 젊은이들이
훗날 현종때 화려하게 역할을 발휘해
당나라사상 가장 눈부신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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