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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쟁이 골초' 김대중? 첫사랑은 짝사랑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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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쟁이 골초' 김대중? 첫사랑은 짝사랑

AziMong 2009. 8. 22. 19:22

'겁쟁이 골초' 김대중? 첫사랑은 짝사랑

[노컷뉴스 2009-08-22 14:02]
 
'겁쟁이 골초' 김대중? 첫사랑은 짝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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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쟁이 골초' 김대중? 첫사랑은 짝사랑
'인간 김대중의 뒷이야기들' 잔잔한 감동

[노컷뉴스 최진영 대학생 인턴기자] 밤이면 화장실도 혼자 못갈 정도의 겁쟁이였던 그는 하루 세 갑씩 담배를 꼬나물었던 골초였다. 감옥에서 6년의 시간을 보냈고 출소 후 때로 감옥을 그리워하기까지 한 그는 몇 년 동안 좋아했던 여자에게 고백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했던 숙맥인 남자였다.

바로 대한민국 15대 대통령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마냥 강해보였던 김 전 대통령. 생전에 알지 못했던 그의 인간적인 뒷이야기들을 풀어본다.

▲ '민주화 투사 김대중'은 겁쟁이?

김 전 대통령은 납치, 고문치사. 가택연금, 구속수감의 고난 속에서도 '민주화의 별'로써 용기를 잃지 않았다. 끝없이 부딪히고 불의와 맞섰다.

그러나 '나는 겁쟁이었다'라고 밝힐 만큼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어린시절, 밤이 되면 그는 어둠이 무서워 화장실도 혼자 못가 어머니와 누나를 대동해야 했다. 식구들 중 함께 갈 사람이 없을 때는 밤새도록 배를 잡고 끙끙거리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또한 개를 무서워해 강아지를 키우는 이웃집에는 심부름도 가지 못했다.

청년이 된 이후에도 김 전 대통령은 자칭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일례로, 명망 높은 인사를 찾아갔던 날 집 앞에서 문고리를 쥐고 한참을 머뭇거렸던 적이 있다. 가슴이 떨리고 긴장되어 얼굴이 화끈거렸던 것이다.

이처럼 겁이 많은 그였지만, 한 가지 명심해두고 있는 명언이 있었기에 모진 시련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두렵지만 해야 할 일은 한다.' 겁쟁이 김대중을 민주화의 영웅으로 만들어주었던 한마디였다.

▲ 첫사랑은 짝사랑?

김 전 대통령의 첫사랑은 짝사랑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상업학교를 5년 마칠 때까지 연모했던 한 살 연하의 여학생. 편지 한 통 건네지 못했고 말 한 번 붙여 본 적도 없지만 그 여학생의 얼굴을 한 번 더 보려고 일부러 그녀의 집 근처를 돌아 학교에 가곤 했다.

92년 대선 당시 한 언론사에서 그 여자 분과의 극적인 상봉 장면을 제의했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좋은 기억을 선거에 이용한다는 것은 마치 순백의 천에다 흙탕물을 끼얹는 것과 같다'고 김 전 대통령은 생각했던 것이다.

▲ 줄담배를 피우던 김 전 대통령이 담배를 끊은 이유는?

김 전 대통령은 젊은 시절부터 담배를 하루 세 갑씩 피우는 골초였다. 파이프로 줄담배까지 피웠으니 그의 담배 사랑은 주변인에게 유명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의 첫 금연시도는 본의 아니게 감옥에서 이뤄졌다. 1980년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담배를 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15~20만원 상당의 값을 치루면 담배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몰래 피는 담배는 피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김 전 대통령. 그러한 고집으로 1차 금연에 성공했다.

하지만 첫 금연은 강제적인 면이 강했기 때문일까? 출옥 후 미국으로 강제출국 당하면서 자연스럽게 담배를 다시 접하게 됐다. 그러나 미국의 흡연 문화를 접하면서 그는 자발적인 금연자의 길로 돌아섰다. 당시 미국인들이 흡연에 굉장한 거부감을 표시했던 것. 야만인 대우를 받으면서까지 담배를 피우고 싶지는 않았던 김 전 대통령은 담배를 끊기로 결심했다.

금연을 하기 시작하자 비흡연자로서의 하루는 매우 고통스러웠다. 금단현상으로 펜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글도 쓸 수 없었다. 긴 흰색 물체를 보고 담배로 착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결국 담배를 끊는 데 성공했다. 그의 고집이 이번에도 발휘되었던 것이다.

▲ 플라톤과 6년의 감옥생활

김 전 대통령은 6년의 옥중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고 했던가. 이 시기는 오히려 그에게 값진 시절로 추억됐다.

감옥에 갇혀 있었던 긴 시간 동안 김 전 대통령은 고전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 칸트, 니체, 사르트르, 키에르 케고르, 러셀…. 수많은 서적을 접했고 그때마다 맛보았던 진리에 매순간 탄복했다. 감옥에 온 것이 감사하게 느껴질 정도 였다.

"여기 안 들어왔던들 이런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죽을 뻔했구나!" 어느 날 김 전 대통령이 무릎을 치며 외쳤던 한마디였다.

특히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는 인생을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방향타를 제시해 주었다. 또한 푸시킨,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등의 고전문학작가들의 작품들로부터 영감을 받았는데,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앙상한 뼈를 보며, 무엇을 얻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싸우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책에서 느낀 감명들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알았던 김 전 대통령은 출옥 후 책 읽을 시간이 없을 때, 다시 감옥에 들어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 김 전 대통령의 콤플렉스는?

대통령이 아닌 인간 김대중에게도 콤플렉스가 있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고 러시아에서 매년 1회 초청강연을 했던 지식인이었지만, 항상 그에게는 '대학'에 대한 일종의 갈망이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목포 상업학교 졸업 후 태평양 전쟁의 급박한 정세로 인해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대학 졸업증에 대해 상당한 콤플렉스를 느꼈다. 대학에 가는 것은 김 전 대통령에게 간절한 소망이자 가슴 속 한으로 남게 된 것이다.

이런 '대학 콤플렉스'를 극복하게 된 것은 6대 국회 때였다. 국회 상임위 재정경제위원회에 배속되어, 경제학 박사·전직 경제 각료 등의 구성원과 함께 일하면서부터다. 이들에게 주눅들고 싶지 않았던 김 전 대통령은 치밀한 구상과 충분한 준비로 일을 해 나갔고, '완벽주의자‘란 별칭을 얻으며 구성원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이처럼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부터 우리는 두려움을 소신으로 이겨내고, 극한 상황을 기회로 전환했던 '인간 김대중'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떠났지만 그의 소신과 의지는 영원히 우리 곁에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