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있는 뿌리깊은 이야기
버지니아울프 본문
1941년 3월 어느 날 아침.
한 여인이 영국의 우즈江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돌멩이를 주워 코트 주머니에 잔뜩 집어 넣고는
강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 들어갑니다.
3주후 강가에서 놀던 아이들이 시체를 발견합니다.
여류 소설가이자 비평가이며 철학자인
버지니아 울프(1882-1941)의 삶은 이렇게 마감 됐습니다.
그녀가 남편에게 남긴 유서의 내용을 보며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더듬어 봄다.
"여보, 나는 내가 다시 미쳐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이번에는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군요 ... "
우리들에게 그녀의 이름은 그리 낯설지 않죠.....
박인환님의 저 유명한 시 "목마와 숙녀"를 통해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은 다분히 감성적으로 다가옵니다.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사춘기 시절 한 때 이 시를 암송하지 않았던 사람 없을검다.
그러나......버지니아는 "목마와 숙녀"처럼 센티멘탈한 여인이 아니고
유서의 첫 마디 처럼 정신질환에 시달려 고통속에 살았던 여인임다.
"제 생애의 비밀을 이 유서에서 당신께 말하려 합니다.
제 아버지는 첫번째 아내가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죽자
미망인 줄리아와 재혼을 합니다...... 홀아비와 과부의 결혼이었죠.
아버지에게는 아이가 한명, 줄리아에게는 아이가 네명 있었고,
재혼한 두 사람 사이에서 저를 비롯한 네명이 태어났죠"
그녀의 아버지는 저명한 평론가,전기작가,학자였고,
줄리아는 소문난 미인이자 문학계의 안주인이었슴다.
버지니아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아버지의 교육이었는데
그녀는 감성적으로 읽는법과 훌륭한 글 쓰는 법을 배웠슴다.
20세기가 되기 직전까지도 영국의 웬만한 가문에서는
여자아이들에게 학교 교육을 시키지 않았슴다.
왜냐하면 여자덜을 받아 주는 대학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집에서 가정교사와 부모로부터 배웠던게 거의 전부였슴다.
버지니아는 아버지의 방대한 서재에서 지식을 흡수했고,
아버지 손님들인 당대 일류 지식인들과의 대화에서 지적인 자극을 흠뻑 받았슴다.
그녀가 유명해진 훗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강연 요청을 해 왔을 때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여성의 입학을 금지했었던 명문사학에 대한 적개심을 나타냄다.
그녀가 열렬한 여권 운동자가 된것도 따지고 보면
어릴적의 여성차별에 분개한 반항심에서 비롯 됐다고 할 수 있슴다.
"제 생애의 엄청난 불행은 여섯살 때부터 시작됩니다.
큰 의붓오빠가 저에게 온갖 못된 짓을 했던 거죠.
자기와 신체구조가 다른 저를 세밀히 관찰하고... 만지고.....
그 시절 부터 저는 몸에 대한 수치감과 혐오감을 갖게 되엇습니다.
나아가 性에 관련된 것은 무조건 배격하는 마음도 갖게 되었지요"
실제로 그녀는 결혼뒤에도 섹스를 하지 않고 살았슴다.
신혼여행 중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도
"사람들은 왜 그렇게 섹스에 대해 야단법석일까?"라고 되물을 정도였슴다.
28년간 두 사람은 섹스를 하지 않고도 성숙한, 그리고 행복한 생활을 보냈슴다.
"제가 열세살때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이 저를 덮쳤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마저 암에 걸려 눕고 말았던 거죠.
더욱 힘들었던 것은 작은 의붓오빠마저도 저에게 못된 짓을 했던 것이죠.
무방비 상태에서 그런 일을 수시로 당했던 저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버지니아는 사춘기 시절부터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다녔고
사람들 앞에 서는 걸 극도로 무서워 했슴다.
그녀가 평생 껴안고 살아야만 했던 정신질환도
이때 받은 충격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슴다.
몇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실패했던 그녀는
현실의 불행에서 도피하기 위해 책더미에 파묻혀 지냈슴다.
"당신이 청혼했을 때 저는 두 가지를 요구했었죠.
보통사람 같은 부부생활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작가의 길을 가려는 나를 위해 공무원 생활을 포기해 달라는 것......
세상에...... 이런 요구를 하는 여자와 결혼하려고
성적욕망과 사회적 지위를 팽개치고 오겠다는 사람은
레너드....당신 밖에 없을거예요."
엉망진창인 삶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그녀를
정신적으로 구해준 계기는 레너드와의 결혼이었슴다.
그녀는 케임브리지 대학에 다니던 남동생 토비의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예술과 철학, 문학등에 대한 토론을 즐겨 했슴다.
그녀의 집이 있는 지역이름을 따서
이 토론모임을 "블룸즈버리"그룹이라 했는데
당대의 경제학자 케인즈도 이 멤버중의 한명이었죠.
그녀는 이 멤버중 정치평론가인 레너드와 결혼을 한겁니다.
레너드는 출판사를 차려 그녀의 든든한 후원자가 돼 주었음은 물론
정신병을 가진 아내를 위해 안정적인 생활습관을 만들고, 창작을 격려해 줬슴다.
"당신은 놀라울 정도로 나를 참아냈고,
나에게 너무나 잘해주셨습니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누군가 나를 구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당신이었을 겁니다."
결혼한 다음 버지니아는 작가로, 여권운동가로, 문예비평가로 활발히 활동함다.
친구의 권유를 받아 노동자학교에서 강의하는 한편
사회주의 집단인 페이비언 협회에 가입하여 정치활동도 하고......
문학사에 있어서는 "의식의 흐름"기법을 완성시킨 작가로 우뚝 섰고
여성운동사에서는 페미니즘의 원류로 추앙 받는 존재로 부각 됐슴다.
"당신의 내게 보여준 호의에 대한 확신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이 나를 떠났습니다.
나는 당신의 인생을 더 이상 망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명성과 지위에도 불구하고,
남편 레너드의 헌신적인 배려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평생 괴롭힌 정신질환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슴다.
그녀의 정신질환은 일시적이 아닌 주기적인 것으로서
그녀가 원고를 탈고한 시기와 맞물려 발병하였슴다.
그 정신질환이 그녀를 막바지 까지 갉아먹어 오자
마침내 그녀는 자살을 하게 됨다.
그녀는 남편에게 남긴 긴 문장의 유서를 통해
자신을 괴롭혀 온 정신질환의 원인을 고백했고
부족함 투성이인 자신을 누구보다도 감싸주었던 남편에게
더 할 나위 없는 사랑과 감사와 신뢰를 표시합니다.
"우리들보다 더 행복한 두 사람이 또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한 여인이 영국의 우즈江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돌멩이를 주워 코트 주머니에 잔뜩 집어 넣고는
강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 들어갑니다.
3주후 강가에서 놀던 아이들이 시체를 발견합니다.
여류 소설가이자 비평가이며 철학자인
버지니아 울프(1882-1941)의 삶은 이렇게 마감 됐습니다.
그녀가 남편에게 남긴 유서의 내용을 보며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더듬어 봄다.
"여보, 나는 내가 다시 미쳐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이번에는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군요 ... "
우리들에게 그녀의 이름은 그리 낯설지 않죠.....
박인환님의 저 유명한 시 "목마와 숙녀"를 통해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은 다분히 감성적으로 다가옵니다.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사춘기 시절 한 때 이 시를 암송하지 않았던 사람 없을검다.
그러나......버지니아는 "목마와 숙녀"처럼 센티멘탈한 여인이 아니고
유서의 첫 마디 처럼 정신질환에 시달려 고통속에 살았던 여인임다.
"제 생애의 비밀을 이 유서에서 당신께 말하려 합니다.
제 아버지는 첫번째 아내가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죽자
미망인 줄리아와 재혼을 합니다...... 홀아비와 과부의 결혼이었죠.
아버지에게는 아이가 한명, 줄리아에게는 아이가 네명 있었고,
재혼한 두 사람 사이에서 저를 비롯한 네명이 태어났죠"
그녀의 아버지는 저명한 평론가,전기작가,학자였고,
줄리아는 소문난 미인이자 문학계의 안주인이었슴다.
버지니아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아버지의 교육이었는데
그녀는 감성적으로 읽는법과 훌륭한 글 쓰는 법을 배웠슴다.
20세기가 되기 직전까지도 영국의 웬만한 가문에서는
여자아이들에게 학교 교육을 시키지 않았슴다.
왜냐하면 여자덜을 받아 주는 대학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집에서 가정교사와 부모로부터 배웠던게 거의 전부였슴다.
버지니아는 아버지의 방대한 서재에서 지식을 흡수했고,
아버지 손님들인 당대 일류 지식인들과의 대화에서 지적인 자극을 흠뻑 받았슴다.
그녀가 유명해진 훗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강연 요청을 해 왔을 때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여성의 입학을 금지했었던 명문사학에 대한 적개심을 나타냄다.
그녀가 열렬한 여권 운동자가 된것도 따지고 보면
어릴적의 여성차별에 분개한 반항심에서 비롯 됐다고 할 수 있슴다.
"제 생애의 엄청난 불행은 여섯살 때부터 시작됩니다.
큰 의붓오빠가 저에게 온갖 못된 짓을 했던 거죠.
자기와 신체구조가 다른 저를 세밀히 관찰하고... 만지고.....
그 시절 부터 저는 몸에 대한 수치감과 혐오감을 갖게 되엇습니다.
나아가 性에 관련된 것은 무조건 배격하는 마음도 갖게 되었지요"
실제로 그녀는 결혼뒤에도 섹스를 하지 않고 살았슴다.
신혼여행 중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도
"사람들은 왜 그렇게 섹스에 대해 야단법석일까?"라고 되물을 정도였슴다.
28년간 두 사람은 섹스를 하지 않고도 성숙한, 그리고 행복한 생활을 보냈슴다.
"제가 열세살때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이 저를 덮쳤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마저 암에 걸려 눕고 말았던 거죠.
더욱 힘들었던 것은 작은 의붓오빠마저도 저에게 못된 짓을 했던 것이죠.
무방비 상태에서 그런 일을 수시로 당했던 저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버지니아는 사춘기 시절부터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다녔고
사람들 앞에 서는 걸 극도로 무서워 했슴다.
그녀가 평생 껴안고 살아야만 했던 정신질환도
이때 받은 충격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슴다.
몇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실패했던 그녀는
현실의 불행에서 도피하기 위해 책더미에 파묻혀 지냈슴다.
"당신이 청혼했을 때 저는 두 가지를 요구했었죠.
보통사람 같은 부부생활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작가의 길을 가려는 나를 위해 공무원 생활을 포기해 달라는 것......
세상에...... 이런 요구를 하는 여자와 결혼하려고
성적욕망과 사회적 지위를 팽개치고 오겠다는 사람은
레너드....당신 밖에 없을거예요."
엉망진창인 삶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그녀를
정신적으로 구해준 계기는 레너드와의 결혼이었슴다.
그녀는 케임브리지 대학에 다니던 남동생 토비의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예술과 철학, 문학등에 대한 토론을 즐겨 했슴다.
그녀의 집이 있는 지역이름을 따서
이 토론모임을 "블룸즈버리"그룹이라 했는데
당대의 경제학자 케인즈도 이 멤버중의 한명이었죠.
그녀는 이 멤버중 정치평론가인 레너드와 결혼을 한겁니다.
레너드는 출판사를 차려 그녀의 든든한 후원자가 돼 주었음은 물론
정신병을 가진 아내를 위해 안정적인 생활습관을 만들고, 창작을 격려해 줬슴다.
"당신은 놀라울 정도로 나를 참아냈고,
나에게 너무나 잘해주셨습니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누군가 나를 구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당신이었을 겁니다."
결혼한 다음 버지니아는 작가로, 여권운동가로, 문예비평가로 활발히 활동함다.
친구의 권유를 받아 노동자학교에서 강의하는 한편
사회주의 집단인 페이비언 협회에 가입하여 정치활동도 하고......
문학사에 있어서는 "의식의 흐름"기법을 완성시킨 작가로 우뚝 섰고
여성운동사에서는 페미니즘의 원류로 추앙 받는 존재로 부각 됐슴다.
"당신의 내게 보여준 호의에 대한 확신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이 나를 떠났습니다.
나는 당신의 인생을 더 이상 망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명성과 지위에도 불구하고,
남편 레너드의 헌신적인 배려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평생 괴롭힌 정신질환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슴다.
그녀의 정신질환은 일시적이 아닌 주기적인 것으로서
그녀가 원고를 탈고한 시기와 맞물려 발병하였슴다.
그 정신질환이 그녀를 막바지 까지 갉아먹어 오자
마침내 그녀는 자살을 하게 됨다.
그녀는 남편에게 남긴 긴 문장의 유서를 통해
자신을 괴롭혀 온 정신질환의 원인을 고백했고
부족함 투성이인 자신을 누구보다도 감싸주었던 남편에게
더 할 나위 없는 사랑과 감사와 신뢰를 표시합니다.
"우리들보다 더 행복한 두 사람이 또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