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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의 육담<22> - 처녀와 소금장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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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의 육담<22> - 처녀와 소금장수

AziMong 2008. 2. 2. 19:44
강원의 육담<22> - 처녀와 소금장수 
 
 내외가 길을 나서다가 소금장사와 마주치자 부인이 소금장사에게 "딸래미만 남겨두고 잔찻집에 가서 내일 오니 소금 살 사람이 없어요." 하고 말했네. 소금장사는 곧바로 처녀 집으로 달려가 "나는 니 외삼촌인데 어려서 보고 이제 보니 몰라보겠구나. 오다가 네 에미 애비를 만났는데 집을 잘 봐 주라 하더라." 이러 말했지.
 안심하고 소금장사를 집에 들이자 "아가, 속병이 있구나. 해를 보면 눈이 시큼하지? 무거운 거를 들면 팔이 아프지?" 하더래. 처녀애가 "예." 하고 대답했네. "그게 다 속병 때문이니 가죽 침으로 고름을 빼야 한다." "그럼, 얼른 놔주세요." 소금장수는 처녀의 치마를 걷어올리고 속곳을 내렸네. "처음에는 아프지만 곧 괜찮아지니 참아라. 그래야 병이 낫는다." 이래 성욕을 채운 소금장수는 아침상까지 푸짐하게 받고 떠났대요. (자료제공 ; 강릉민속문화연구소)
 
 공짜 섹스 이야기는 이로써 세 번째다. 무명장수와 새우젓장수 이야기도 있었다. 다 기발한 아이디어로 말하자면 '공X'을 하게 되는데, 속임수와 배짱으로 밀어붙인 무명장수가 비열했다면 이 이야기는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다. 처녀애가 순진한가, 순진한 척 하는가. 아침상까지 푸짐하게 받고 떠났다면 병이 나았다고 믿은 건가, 아니면 성적 만족감이라도 얻은 건가.
 육담 몇 가지를 이렇게 살펴보니, 떠돌이 장사꾼들의 잔꾀란 혀를 내두를 정도이지만, 여기 처녀애의 '무식한 척하기' 또는 '모르는 척하기'는 소금장수를 뺨친다. 따라서 이 이야기로 우리들의 생각은 다시 한 번 바뀐다. 섹스 같은 '혐오스러운 짓'과는 무관하고 결코 더럽혀지지 않는 청순한 처녀는 동경의 대상일 따름이 아닌가, 하는 생각. 또 섹시한 여자들이 판치는 요즈음 청순한 여자란 무슨 의미를 갖는가, 하는 따위의 생각들.
 다시 말하면 현실에선 동정녀 마리아 같은 여자란 없다는 얘기다. 있다면 단테의 연인인 베아트리체와 젊은 베르테르의 연인 롯테처럼 문학 작품 속에서만 존재할 따름이다. 백 번 양보하여 '청순한 숫처녀'가 있다 해도 섹스하지 않는 플라토닉 러브를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겠나. 이런 측면에서 같은 문학 작품이라도 '춘향전'에서의 성춘향과 이몽룡의 불같은 사랑 혹은 섹스는 리얼리티가 있어 공감이 간다.
 다음, "처음에는 아프지만 곧 괜찮아지니 참아라."와 관련해 담론을 계속해 보자. 아마도 숫처녀일 것이 분명한 이 처녀의 처녀성을 빼앗은 소금장수의 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사실 역사를 들춰보면 이런 짓을 자행한 예가 적지 않다. 중세 유럽으로 건너가 보면, 봉건 군주가 이른바 '신부 초야권'이라는 황당한 권리를 함부로 행하는 얘기가 나온다.
 지금은 여자의 처녀성을 크게 가치 있다 보지 않을지 몰라도 예전엔 숫처녀를 신성시했다. 대표적 예로 '심청전'이 그러하지 않았나. 숫처녀가 아니었으면 용왕은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을 터이다. 로마나 인도에선 신부를 신에게 바치고 신의 '거시기'로 처녀막을 뚫는 의식이 있었다. 처녀막이 파열됐을 때 나오는 피에 독성이 있다 믿어 숫처녀와의 성교를 위험한 짓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중세 유럽에선 신부의 처녀막을 촌장 등 다른 남성의 힘을 빌어 찢도록 했고, 이것은 신랑이 입을 횡액을 피하게 하려는 일종의 주술적 행위였다.
 이런 풍습들이 '신부 초야권'이라는 걸로 더럽게 퇴화되는데, 1538년 스위스의 츄리히에서 발행된 공문서엔 이렇게 씌어 있다. "농지를 소유하는 영주는 영지 내 농민이 결혼할 때, 그 신부와 초야를 보낼 권리가 있다. 신랑은 영주에게 신부를 제공하는 것이 싫으면 30 페니히를 지불해야 한다." 또 독일의 바이에른 지방에서도 신부가 '자기 엉덩이와 같은 무게의 치즈나 버터'를 영주에게 바쳐야 했다. 이런 풍습은 16 세기, 러시아에선 18 세기까지 계속됐다.
 그런데 처녀들이 이에 기꺼이 응했다 하는데, 그러나 섣부른 오해는 말라. 이는 섹스의 즐거움에 대한 기대 때문이 아니라 그녀들의 부모에게 세금을 감면해 주는 혜택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눈물나는 얘기 아닌가. 영주에게 있어서 농부의 딸은 돈이 들지 않는 창부 같은 존재였기에 인격이라곤 조금도 인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참을 수 없나니, 예나 이제나 권력의 이런 따위의 치사하고 더러운 횡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