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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의 육담 <27> 낮거리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어느 날, 할 일이 없어 방안에서 뒤척거리다가 모처럼 본 마누라와 한번 하고 싶은 생각이 났어요. 그런데 비가 오니 아들은 바깥에 놀러 나가지도 않고 옆에 누워 어쩔 도리가 없었대요. 쫓아낼 궁리를 하던 아버지는 아들을 심부름 보내 놓고 그 사이에 하려고 마음먹고 "야, 작은댁에 가서 도끼를 좀 빌려 오너라" 했는데, 심부름 다녀오라는 소리를 들은 아들은 비가 쏟아지는데 심부름을 가라 하니 귀찮아서 어머이 눈치만 봤대요.
그러자 아버지는 "빨리 안 가고 뭘 해" 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아들놈을 빗속으로 내몰고는 마누라 옷을 벗기고 급하게 배 위에 올라갔네.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는데 문 밖에서 아들놈이 기침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래요. 그만 화가 난 아버지가 "심부름은 안 가고 거기서 뭘 하나?" 하고 소리치자 아들놈이 비를 맞으며, "아버지, 왜 여기서 낮거리를 하나요? 비 오는데 오늘 낮거리는 작은댁에 가서 안 하나요?" 이러더래. (자료제공 ; 강릉민속문화연구소)
하, 그놈 애비를 위해 좀 자리를 비켜 주면 좋았을 것을. 아직 어리니 뭐를 알겠나. 그래도 아들은 아버지가 '작은댁'에서는 자주 낮거리하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작은댁이라…. 생각해 보면 매우 섹시한 어휘가 아니던가. 본 마누라와의 섹스는 의례적이겠지만 작은댁하고야 어찌 진한 섹스를 하지 않을 수 있을꼬. 남자들이란 예나 지금이나 다양한 사연으로 작은댁을 두게 되겠지만, 깊이 따져보면 결국 또 한 사람의 새로운 섹스 파트너를 얻는 게 아니겠나.
'작은댁' 하면, 무엇보다 미당 서정주의 '영산홍'이란 시가 떠오른다. 이렇다. "영산홍 꽃잎에는/ 산이 어리고/ 산자락에 낮잠 든/ 슬픈 소실댁/ 소실댁 툇마루에/ 노인 놋요강/ 산 너머 바다는/ 보름살이 때/ 소금밭이 쓰려서/ 우는 갈매기" 소태 같은 인생살이에 슬픔을 안고 사는, 놋요강에 오줌 누는 섹시하고도 한 맺힌 젊은 소실댁이 어렴풋이 그려지지 아니하나. 정실에 대한 사랑이 자애(慈愛)라면 애첩에 대한 사랑은 익애(溺愛)라 한다니, 한은 한대로 놔두고, 어찌 됐건 소실댁에게 누구나 진한 성적 느낌을 아니 가질 수 없도다.
옛날 사대부가엔 대체로 한두 명 소실을 뒀었다. 이는 유가(儒家)의 공인된 탈(脫)윤리적 위선적 풍속이기도 하지만, 우좌지간 문화의 한 현상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소실댁 두기가 얼마나 성행했던지 작은집, 작은댁, 꽃계집, 적은집, 시앗, 노리개, 소실, 조실, 추실, 첩실, 첩부, 소가, 소성(小星), 별가, 별관, 별방, 별실, 측실, 소초, 눈엣가시, 첩데기, 첩장이 등 그 이름도 다양하다.
기왕에 시로 예를 들었으니, 중국의 경우를 엿볼 수 있는 두보(杜甫)의 시를 감상해 봐도 좋으리. "텅 빈 골짜기에/ 숨어 사는 절세가인은/ 본래는 양가집 따님/ 영락하여 비천하게 되었다네/ … / 경박한 남편은 한술 더 떠/ 새 첩실 얻어 금이야 옥이야 하는구나.//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꽃잎을 접는/ 자귀꽃 오히려 깃들이지 않거늘/ 새 첩실 웃는 것만 보이고/ 어찌 본처의 통곡 소리 들리지 않는가….” 중국의 기품 있는 가문에선 3처4첩(三妻四妾)이 하나의 전통이었으니, 이런 정도의 탄식을 특별하다 할 수는 없으렷다.
우리의 고전소설 '홍길동'의 주인공 길동이 첩의 소생, 즉 서자(庶子)란 걸 모르는 사람 없을 터. 길동의 아버지 홍 판서가 본마누라에게 한번 하자 요구했더니, 웬걸 "어찌 시정의 필부잡배와 같은 행동을 한단 말이오."라는 마누라의 일갈에 무안당하자, 마침 방년 18 세 꽃 같은 시비(侍婢) 춘섬이 눈앞에 어른거리기에 한번 했는데, 예서 나온 아이가 길동. 기골이 장대하고 신동이었지만 호부호형(呼父呼兄) 못하는 한 맺힌 인생이라. 이에 적서(嫡庶) 차별로 불만 가득한 사람을 모아 의적단(義賊黨)을 조직해 강원도 소양강가에 아지트를 만들어 훈련하여 관가에 쳐들어가 부패한 관리를 척결함으로써 마침내 새로운 세상을 건설한다는 내용이 '홍길동전'이 아니던가.
이런 글을 쓴 허균이 소설 그대로 모반하다가 발각돼 처형된 7 년 뒤인 인조 3년에 적서차별 금지 정책인 '서얼허통법(庶孼許通法)'이 제정됐지만, 실효를 얻지 못했다. 이 때 서(庶)는 양처의 자식이요, 얼(孼)은 천첩의 자식이다. 그러니 첩에도 상대적으로 대우가 좋은 첩이 있었고, 더 천히 여겨진 첩이 있었다. 참고로 길동은 천첩의 자식이었다. 17 세기인 숙종 때 이조판서와 영의정을 지냈던 최석정(崔錫鼎)이 서얼의 인재 등용을 강력히 요청했지만, 이것도 별 효과를 못 봤다. '화랑세기'엔 신라 왕가에서 정비의 자식은 대군, 서자는 군이었고, 적자 딸은 공주, 서녀는 옹주라 하고 있다.
역사 상 사대부가의 서얼 얘기가 이렇게 계속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하위 계층은 그렇지 않았으나 결국 어느 시대, 어느 나라나 상류층은 또 다른 섹스 파트너인 첩을 두는 문화를 끈질기게 유지했다는 것이다. 1695년 숙종 을해년에 영남 사람 남극정(南極井) 등 988 명이 연명으로 왕에게 상소하여 자신들이 처해 있는 부당한 처지를 호소했으나 승정원에 의해서 저지됐고, 3도 서류(庶流) 황경헌(黃景憲) 등은 7 개월 동안 왕궁 앞에 연좌했지만 정작 서얼 금고가 풀린 것은 그로부터 200 년이나 지난 갑오경장(1894년) 이후였다. 그리고도 첩 문화가 단절되지 않았고…, 상기 육담은 분위기 상 그 이후 1900년대의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그러면 오늘날엔 첩 문화가 어떻게 돼 있나? 부분적으로는 비슷한 형식이 유지되고 있을 것이지만, 계층을 초월하여 더욱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형태의 첩을 거느리고 있다. 룸살롱을 비롯해 얼마나 많은 변형된 첩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가. 아니, 요즘 강조되는 성적 자유주의야 말로 자본주의의 마케팅이 아니라 누구나 보다 많은 섹스 파트너를 갖고 싶다는, 또 가져야 한다는 인간의 성적 욕망의 평등성 혹은 보편성에 그 근간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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